▲ 지종우 교도ㆍ동안양교당
동학(1860)을 전후로 하는 근대 한국 종교사에 있어서 선천 후천 각 5만년으로 새시대의 전환과 개벽을 알렸던 신흥종교들. 그 가운데 1924년 '불법연구회'창설을 기점으로 하여 정신개벽의 기치아래 현재 국내 4대종교의 위상에 원불교가 자리잡고 있다. 소태산대종사의 출현과 대각(1916)이후 95년. 재가의 한사람으로서 몰록 송연해짐에 따라 일원상 거울 앞에 재삼 옷매무새를 고쳐본다.

'돌'이라고 보기 보다는 '100일'임에랴 자축은 시기상조 그저 축복(인정, 존경)을 받아야 할터….
무언가 초점이 외향적으로만 치우지지나 않는지. 존경도 억지 존경이나 구걸 존경이라면 차라리 없는만 못할진저. 소리 없이 일사불란하게 내실을 비추었다는 선대 종단의 실력이 더 더욱 갈망하게 됨은 어느새 헌 종교인이 되어버린 듯한 내가 못난 탓이기로 삭혀본다.

'새 종교-내 자신은 그 의미를 어느만큼 자각하고 있는지. 생활불교·실천불교-드러내지도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지. 용어만 배우고 익혔지 돌파도 못한 채 언어의 유희 속에서 못 벗어나고 있지나 않는지. 출가와 재가를 프로와 아마로 쉽게 비견해버리고 책임 탓만 돌리고 있는지. 훈련법 숙지는 커녕 로마(?)로 가는 길은 많다고 하여 어쭙잖은 편 가르기나 조장하고 있지나 않는지. 겨우 심고·기도·염불·좌선 쪼금 해놓고 수행한다고 자족에 빠져있지나 않는지. 무위를 쫒다 망상에만 허우적거리지나 않는지. 무엇이 신앙인지 무엇을 수행하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자행자지하지나 않는지. 자신의 성불제중은 요원하기만 한데 '두고두고, 오래오래', '제생의세'란 말에 지레 겁먹고 나태를 즐기고 있지나 않는지. '교화단 교화'- 성장 키워드 앞에서 '단'에 얽매어 의존도만 높이고 그만큼 자신에게 협소하게 안위만 챙기지나 않는지. '종교' 참 의미는 외면한 채 그 시스템 속에만 빠져 허우적거리고나 있는지.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무아봉공'을 위장하고 있지나 않는지. 왜 종교인이어야 하는지, 그 참 모습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대종사의 개벽과 나의 개벽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 간극은 얼마나 있는지. 배금주의에 빠져 스스로 파란고해를 자처했음에도 대접받기만을 원하고 있지나 않는지. '새시대·새종교-개벽'이 필연으로 대두되었다면 새 인연들에게는 과연 지금의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나 아는지 모르는지. 황공한 그 인연들에게 신바람 날 만한 유인책도 마련 못하고 그저 동기부여 부족 탓만으로 돌리고 있지나 않는지….'

꼬리없이 이어지는 사량에 놀라서 잠시 멈춘다. '어쩔 것이여?' '초심으로, 다시 또 시작할 뿐.' 철 좀 들자꾸나. 법향기 듬뿍한 지구촌 돌잔치! 기대 확신하며 지난 날을 하루 폭 잡고 바쁜 갈 길에나마 촌간의 글귀로 다독거려 본다.

'설레고 넘쳐라'
응급처치를 해야 할 위급상황 만났는가, 더없이 푸르른 저 하늘을 보라.
인생의 무의미에 수를 놓고 싶은가, 서재의 꽂힌 한권의 책을 보라.
사는 재미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가,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외로움에 혼자서 울고 있는가, 조용히 이불 밑에서 일기를 써라.

험한 파도 닥친다고 울고 있는가, 건너갈 땅에서 축배를 준비하라.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가, 눈부시게 화창한 태양을 보라.
얽히고 설킨 인생의 타래를 풀려고 하는가, 초연한 열정으로 고요를 초대하라.
신비한 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은가, 그럼에도 불구한 기적을 챙기라.
보람찬 한 주간을 보내고 싶은가, 신선한 지혜로 설레고 넘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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