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승한 교도·안양교당(논설위원)
어느새 2010년의 마지막 장 달력이 눈앞에 다가왔다. 올 한해를 어떻게 지냈는지 다이어리를 살펴보다 빼곡하게 쓰여 있는 월별 일정표를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참 바쁘게 살았구나 하면서 그래도 지금까지 잘 지내 왔으니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문득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귓가를 스친다. 나름 계획한 것을 이루었고 매사에 충실히 해왔다고 정리하면서, 스스로 위로도 해보지만 이렇게만 살아선 안 될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에서 내려 달려온 쪽을 뒤돌아보고 잠시 쉰 뒤에 다시 길을 간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온 탓에 자신의 영혼이 아직 뒤쫓아 오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 잠시 멈춰 서서 뒤쳐졌을지도 모르는 영혼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아쉬움은 나를 조금씩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은 아닐까?

1980대 후반 이탈리아의 카를로 페트로니(Carlo Petrin)는 로마에 대표적 패스트푸드 음식점인 맥도날드 매장을 열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후 그는 국제 슬로푸드단체를 조직하여 항상 시간 부족으로 종종걸음 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서, 천천히 그리고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먹고, 삶의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자는 문화운동(slow movement)을 벌여왔다. 시간이 가면서 이 생각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러 나라들에서 유사한 움직임이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먹을거리에 대한 주제를 넘어서 자녀양육, 여행, 그리고 쇼핑 등 다양한 분야로 이런 문화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천천히'를 외치고 있는 슬로운동은 지금 생활을 전적으로 바꿀 수 없는 대다수 현대인들이 충실히 실천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 많이 하지 않기 국제연구소(The International Institute of Not Doing Much)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천천히 사는 삶을 실천하는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첫째, 아무 일도 안하고 하릴없이 창가에 다리를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한잔 마셔라. 둘째, 한 번에 한 가지 일만하라. 셋째 다른 사람이 하는 질문들에 답하도록 강요받지 마라. 즉 신중히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을 서두르지 말라. 넷째 자주 하품을 하라. 다섯째 침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 그 외 욕조 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 어렵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자주 웃어라 등 일상생활 속에서 한 번씩 실천해 봄직한 방법들로 매우 동감하는 부분이 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사람의 복(福)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누었다. 열복은 사람들이 출세라고 하는 높은 직책과 명성 그리고 부를 얻고자 하고 이를 가지는 복 즉 세속적 복인 반면에 청복은 깊은 산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세상을 여유롭게 관조하면서 삶의 가치를 한껏 누리면서 사는 복을 말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늘이 아껴 잘 주려하지 않는 것이 청복이고, 열복은 많은 사람이 얻기 쉽지만 청복을 얻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느리게 살기 운동은 궁극적으로 삶에 있어 좀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사회문화운동이며 소박한 청복을 누리고자하는 작은 소망이다. 이는 물질이 지배하는 파란고해(波瀾苦海)에서 벗어나 정신적 가치를 깨닫는 원불교 이념세계와도 통하는 바 없지 않다.

2010년 한해가 어느새 다 갔다. 오늘이라도 세속적 우선순위에 밀려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작은 것들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는가 생각하면서 소박한 슬로 라이프 (slow life)를 실천해 봄은 어떨지.

2010년 말 우리 삶을 원만구족(圓滿具足) 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꾸려 갈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양성하며 그렇게 사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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