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 깃든 초기정신, 오늘날 되살려야

▲ 교단 초기 영산성지의 영산원 전경.
원불교 성지가 자리 잡은 영광은 오래된 지역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법성포 백제 최초불교 도래지를 비롯, 법성포 굴비와 모싯잎 떡, 염산 젓갈 등 여러 가지 지역 특산품이 생산되고 있다.

영광의 별호인 옥당골의 유래는 고려 성종때 부터 시작이 됐다. 옥당은 고려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홍문관의 별칭이기도 하다. 옥당의 뜻은 정3품 이하의 부제학(副提學), 교리(校理), 부교리(副校理) 등을 총칭하는 말로 시종학사들을 지칭한다. 즉 종3품 이하의 관리 자제들이 지역 특산물과 토산품으로 물자가 풍부한 영광에 부임해 온갖 수탈로서 재원을 마련하여 중앙정부로 올라가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서 얻은 이름이니 만큼, 옥당이라는 별호속에 감춰진 가슴 아픈 역사와 질곡의 삶이 대략 짐작 된다.

영광 굴비와 관련된 고려조의 이자겸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분에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고 이자겸의 둘째딸이 예종 비(妃)인 순덕(順德)왕후가 되자 익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사위인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예종의 아우들을 물리치고 외손자인 14살의 어린 태자, 인종을 옹립하여 권세를 잡았다.

외손자와 인종의 친 이모를 짝지어 왕비로 삼았고, 이도 모자라 셋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고 5개월 만인 그 이듬해 인종 3년(1125) 1월에 또 다시 그의 넷째 딸을 조카인 인종에게 시집보내 조카와 친 이모사이인 두 여식을 해만 바뀌었지 5개월 사이에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 자신의 권력기반 구축 마련에 몰두했다.

이후 이자겸은 자기 일파를 요직에 기용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모략을 꾸미다가 사위이자 친 외손자인 인종의 독살을 기도하고 관직을 팔아 축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인종 4년(1126) 2월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난입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권유로 뜻을 바꾼 척준경에 의해 체포되어 동년 5월에 그의 아내 최(崔)씨, 그리고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에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고 왕비가 되었던 그의 두 딸도 모두 폐위됐다.

영광에 유배를 온 이자겸은 귀양지에서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바짝 말린 석수어(石首魚)를 인종에게 굴비(屈非)라는 이름으로 진상했다는 설이 있으나 유배 7개월 만에 영광 땅에서 삶을 마쳤다.

이자겸의 굴비와 관련된 지명으로는 영산성지에서 법성포쪽으로 향하다 보면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는 응암 바위를 지나 자리 잡고 있는 한시랑 마을이 관련이 있다.

한시랑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고려조에 유배지로서 영광의 법성포 인근의 한시랑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즉 시랑벼슬을 한,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귀양살이를 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한시랑'이라 했다는 것이다. 고려 때 시랑은 정4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이 한시랑 마을 인근에 은선동이라 하여 신선이 숨어 사는 동네와 함께 오래된 폐사 사자암 터가 있다. 또한 이 한시랑 마을에는 영광 칠산 앞바다로 흘러가는 길목에 큰 소드랑섬(鼎島)과 작은 소드랑 섬과 법성포를 지나 칠산 앞바다의 칠산도가 있다.

와탄천을 따라 가다보면 법성포에 자리 잡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가 있는데, 산 태극과 물 태극을 이루어 흘러가는 모습도 장관이려니와 소드랑섬의 솥의 의미를 대산종사는 삼학훈련으로 불보살을 만들 수 있다는 말씀으로 훈련에 중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다.

예로부터 영광은 바다와 인접한 영향도 있었거니와 관으로부터 각종 수탈과 억압으로 인하여 민중의식이 발달된 탓도 있었으며, 자연 발생적으로 호남 지방에는 민족종교의 창도가 성행하였으며 오래전부터 도참사상이 발달된 지역이었다. 지역적으로 외지로 분류된 까닭으로 영광은 일찍이 호남지방의 유배지로서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학자들로부터 신 문물을 받아들이는 효과가 있었으며, 이러한 지역적 특색과 함께 민중들의 생활환경은 자연적으로 종교적인 열망의식이 남달랐다.

19세기 신흥종교 세력의 등장

호남지방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혁명 최초 봉기지가 인접한 지역적 영향으로 인하여 동학혁명의 불길이 영광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후 동학 혁명군은 일본군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고 많은 인명 손실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호남 지역에는 도참사상과 관련된 많은 신흥 종교들이 탄생을 하였고 증산교 일파의 종교들이 호남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무렵에 서양에서 전래된 기독교가 영광에 들어오게 된다.

〈교고총간〉에 보면 청년 대종사는 불교와 기독교 등 다른 여타 종교에서 문제 해결을 하려고 노력을 하던 중에 서양에서 전래된 야훼교에서 말하는 신을 향해 온갖 시험을 했다고 한다. 청년 대종사가 살았던 시대적인 환경은 오늘날과 비할 바 없이 민중들의 삶은 고달팠고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종교적 성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소태산대종사의 구도열정 또한 남달랐을 것이고 1916년 노루목에서 이루어진 '장항대각'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불법의 시대를 영산에서 열어보고자 했을 것이다. 도덕을 모르고 살던 민초들을 교법을 통해 훈련시키고, 금주 금연과 보은미 저축 등을 통하여 작은 자본을 키워 숯장사로 자본을 마련하여 정관평을 막았으며, 제자들에게 복록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기복신앙을 배격하여 사실적이고 반드시 성공하는 새 불교로서의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다.

소태산대종사의 영산 재세 당시는 영산이라는 신앙 수행 공동체 내의 삶은 재가 출가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터전이었다. 교육과 노동의 현장이었고, 남녀노소와 재가 출가가 같이 어울려 교법을 직접 실천하고 구현해 낸 역사의 현장이었다.

또한 익산총부 건설 당시에 가끔씩 들르신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시안에(겨울) 솝리에서 종사님께서 오시면 법설을 들으려고 멀리 함평에서부터 황토길을 따라 흰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으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논길로 걸어오셨다고 한다.

이처럼 과거 역사의 박제된 영산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생생약동하는 교법실천의 현장이 영산성지의 오래된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어야 하고 영산성지 순례에서 이러한 소태산 대종사의 초기 정신을 배우고 익혀야 진정한 교단의 맥이 상전하리라 본다.

영산성지는 소태산대종사의 탄생과 더불어 구도와 대각을 통한 원불교 회상 창건의 시작이었고, 미래 불법시대의 아주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 그러나 간난한 교단 현실속에서 교단은 외형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가장 원초적인 초기 정신문화의 보고이자 소태산대종사의 역사의 현장 모습들은 기본적인 보존과 복원, 그리고 성지의 기본 계획마저도 세우지 못하고 원기 백년을 앞두게 된 현실이다.

영산성지는 소태산대종사를 위시하여 정산종사와 주산종사 대산종사에 이르기까지 교조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의 원불교 근간을 이룬 대각여래위 어른들이 머무신 정신적 고향이나 명성과 지위에 걸맞는 보존과 정비는 시급한 일이 될 것이다.
원불교의 발상지이면서도 기초적인 보존과 정비 문제는 늘 뒤안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산종사는 원기100년에 회갑을 맞이하는 교무진에게 원불교100년에 영산성지가 드러나야 세계 속에서 원불교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개발이 아닌 회상 초기의 건물과 현장들이라도 복원 및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과 함께 신앙수행 공동체로서의 현장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소태산대종사의 초기 정신의 맥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집단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중앙총부영산사무소 >

※신년호부터는 변산성지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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