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병천 교도ㆍ안양교당
일정이 바쁜 가운데 낯선 번호가 찍혀 전화해보니 원불교신문사라고 한다. 원고를 부탁한다기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무슨 말을, 어떤 주제를 말할까? 평소에 가끔 되뇌이어 보던 말을 여기에 옮겨본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이 어디서 어떻게 돕는다는 것일까? 앞의 말은 〈중용〉의 말이고 뒤의 말은 속담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은 모두 하늘로부터 나오고 때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올해 학교에 온 뒤로 가끔 떠올린다. 하늘의 속성은 말 없이 운행하여 사시 순환하고 세상을 밝게 비춰주며 음양조화 작용하는 가운데 그 덕(德)으로 인간은 살아간다.

일찍이 하늘에 대한 관심은 동서양의 성현 등을 위시하여 헤아릴 수 없다. 혹자는 "대체 하늘과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할지 모른다. 선현들이 밝혀 논 사실을 근거해보면 "만물개비어아(萬物皆備於我)-모든 이치가 내안에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나왔으니 모두가 하늘사람이다.(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그렇고, 사량(思量) 계교(計較)심이 생기면서 멀어져갈 뿐이다.) 그런데 자기만 잘 살려고 하니 남들이 외면하게 된다. 자기를 제외한 모두는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심 없이 대하는 상대마다 같은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면, 수긍하고 도와주고 나누고 이해해 주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일이다. 우리는 잘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생을 마칠 즈음, 웃으며 나 정말 잘 살았어! 흐뭇해 할 사람이 많을까? 세상을 원망하고 아쉬워하며 후회하는 사람이 많을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게 산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된다. 가치 있는 일에 우직스럽게 자기의 이상과 목표를 향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 귀해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앞으로는 머리 좋고 약삭빠른 사람보다 심성이 곱고 상대를 배려하며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하는 사람이 성공하리라고 본다. 오랜 시일을 지내어 사람됨을 겪고 보면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승께서 대금을 전공하는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다. "강 상류에서 떠내려간 나무토막이 흘러 가다가 강 기슭에 걸리지도 않고 계속 흘러간다면 반드시 바다에 이를 것이다"하시고 "한 송이 꽃이 보기에 좋지 않으냐? 누가 봐 주기를 원해 핀 것은 아니지만, 꽃이 피니 정말 보기에 좋구나!" 그 뒤로 스승님의 말씀을 이정표 삼아 청중의 심금에 잔잔한 감동을 일렁이고자 정성을 다하려 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거나 섭섭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했다.

군자란 하늘의 명(命)을 아는 사람을 일컫는다. 자신을 되돌아볼수록 흠과 모자란 점 끝이 없으니 남들과 시비(是非)를 논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이제야 생각뿐이지만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어리석고 둔한 것은 어릴 때나 매한가지인가? 인십기천(人十己千)이라고 했다. 그 무엇이 되었던지 여느 사람 보다 천 배를 노력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한걸음 나아가, 나와 마주하는 부모·형제·동포·인류를 향해 마음으로 빌어주고 몸으로 실행하고 물질로 나누기를, 곳과 때에 따라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하나하나 실행하다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삶의 근본은 공경에 있는 것이며 사리를 연구해 선(善)을 행하는 것이며 그 실질을 몸소 실천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써 종신사업(終身事業)의 목표를 삼은 율곡선생의 말씀에서 하늘의 명(命)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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