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장엄의 진실 보여주는 곳

▲ 변산 제법성지 봉래정사.
▲ 눈 덮인 제법성지의 풍경은 적멸의 아름다움이다.
밤새 또 다시 흰 눈이 온 산을 덮었다. 성지를 겹겹이 에워싼 하얀 산등선들이 쪽빛 하늘을 이고 물결처럼 흐른다. 그 시리고 눈부신 산의 숨결 속에서 어느덧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눈 덮인 제법성지의 풍경은 '적멸의 아름다움' 그것이다.

산중풍경

산들은 오래 전 그 분을 기억하며 골짜기 마다 새겨진 그 분의 발자국을 아직도 순결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무것도 장엄되지 않은 민낯의 성지는 그렇게 오히려 늘 그 분의 체온을, 그 분의 웅혼한 포부와 열정을, 그리고 골짜기마다 메아리치는 사자후의 깊은 음성을 들려준다.
제법성지, 땅 한 평 없이 고작 남루한 비 하나 세워진 곳,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실망하며 돌아선다. 새 회상의 제2의 성지라고 우쭐했는데 교단 백년이 다가와도 늘 그 남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러나 부처님은 '여래가 말한 불토장엄이란 곧 장엄이 아닐 새 이것을 장엄이라 이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법의 진수는 항상 형상 있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제법성지는 물리적 장엄의 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 참다운 장엄의 진실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래서 어쩌면 장엄이 아닌 장엄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 지금의 제법성지는 가장 찬란한 '장엄불토'라는 역설이 통할 수 있을게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내변산 골짜기, 그 어느 곳 하나 그 분의 발자국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 이곳의 수많은 바위와 숲과, 계곡과 호수와 바람은 모두 그 분의 사유의 메타포요 깨달음의 혼을 전하는 비유의 바다였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 그대로 다 성소요 불토장엄이다.

그러기에 금방이라도 이 도량 어디에선가 문득 흰 두루마기의 풍채 늠름하고 눈빛 형형한 30대 초반의 그분이 숲길을 내려오실 것만 같다.

소태산 박중빈이 이곳에 오시던 그 날은 어쩌면 초겨울 쌀쌀한 바람과 아기 눈발이 풋풋하게 날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용덕 교무의 자료에 의하면 소태산의 변산 입산은 양력으로 기미년 12월12일이다. 12월11일에 영광을 출발한 소태산은 서해안 육로로 장장 2백리 길을 걸어 이튿날인 12일에 월명암에 당도한다. 그 해 3월 오창건을 대동하고 일차 다녀 간 후, 당신의 수제자인 정산을 '명안'이라는 불명으로 백학명선사 문하에 보낸 지 약 3개월 보름 만이다.

이완철 선진의 '봉래산 실상사 탐승기'와 정산종사 '창건사'에는 스승이 영산을 떠나시던 날, 제자들은 기도 시에 쓰던 회중시계 아홉 개를 여비에 보태라고 드리며 섭섭한 정을 눈물로 배별하였다고 기록한다.

간척사업 이후 영산의 저축조합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다. 그러기에 소태산의 변산 여정은 늘 누룽지가루로 끼니를 때우고, 손수 짚신을 삼아 팔거나 돗자리를 떼어다 행상을 하며 노자를 마련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소태산의 변산 입산은 5년간 제법시대를 열며, 변산은 교단사에 제2의 성지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수행자의 산

소태산은 많은 변산 법문 속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고자 이 험로를 찾아왔는가를 자주 물었다. 변산에 부안댐이 완공되고 순환도로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진 것은 불과 15년 전이다. 그 전까지 변산은 그야말로 심산구곡 험로였다.
그런데 91년 전 소태산은 왜 이 험한 골짜기로 들어왔을까?

소태산이 처음 부안 변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종경〉 천도품 25장에 밝혔듯이 아마도 변산 쪽에 어린 맑은 기운을 관한 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후일 그곳을 일차 방문하여 그것이 월명암에 모인 수도대중의 선(禪) 기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미년 소태산의 휴양처 물색은 자연 월명암이 있는 변산 쪽으로 정해졌다.

부안 변산이 어떤 곳인가!

3면이 바다인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우리나라 십승지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채석강과 적벽강 등 바다의 절경을 이룬 외변산과, 봉래구곡은 물론 기암의 산봉우리들이 즐비한 내변산은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산해절승(山海絶勝)'이라 할 만하다.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요(山不在高 有仙卽名),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아야 신령한 물(水不在深 有龍卽靈)'이라고 했던가.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마천대는 해발 509m다. 그래서 높이로 치면 결코 명산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최고의 수행지로 불리는 월명암을 비롯하여 내소사, 개암사, 실상사 등의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안타깝게도 그중 실상사는 제법성지 석두암과 더불어 6·25때 소실되어 지금 복원불사 중임).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삼국시대에는 변산 골짜기에 8천 여 개의 크고 작은 암자가 있었고, 청림지역에 예부터 '승려들의 장터'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불연(佛緣)이 깊은 곳인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변산은 수많은 선각자와 도인을 길러낸 '수행자들의 산'으로 당당히 명산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진표율사가 망신참법(忘身懺法)으로 도를 이룬 '불사의 방(不思議房)은 미륵불교의 발원지가 되었고, 당대 최고의 승려인 원효와 의상은 개암사를 중창하였으며. 울금바위 원효굴은 원효의 화쟁사상이 무르익은 곳이다.

또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이루고, 진묵스님을 비롯한 근대불교의 거장 백학명선사가 정진하던 최고의 수행처다. 어디 그뿐인가. 득도한 내소사 공양주와 도학골에서 도를 이룬 이진사 이야기는 대종사 당대부터 우리회상에 회자되어오던 예화다.

그리고 반계 유형원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후기와 근대에 동학당, 서학당 등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선지자들이 몰려들던 곳이 바로 변산이었다. 그래서 변산의 앞산 뒷산 바위들은 그들이 도를 닦던 수행처라고 전해진다.

1916년 큰 깨달음을 계기로 후천개벽시대의 새 종교를 창시하려는 소태산 박중빈이 영산을 떠나 새로운 근거지로 변산을 택한 것은 이같이 많은 선지자와 도인을 길러낸 수행자의 땅 변산의 영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변산원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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