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은
    민들레세상 지역아동센터장
지난 연말 겨울캠프 마치고, 사나흘 쏟아진 눈속에 파묻힌 길따라 조심조심 출근길을 기어간다. 영광군 백수읍 논산리 어귀 등성이에 점점이 박혀있는 자매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이다. 할머니표 단발머리 자매는 추워서 오돌오돌 거리며 통통 뛰어 온다. 아직 센터차량이 돌지 않을 시간이다. 타라고 손짓하니 '야호' 소리까지 지른다. '들레샘(아이들이 저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민들레샘의 줄임이죠) 차는 두 번째야. 아니 나는 세 번째야…' 선생님 차를 타보는 것을 아이들은 특별대우라고 여기나 보다. 벌써 삼년째가 되었다. 부모의 이혼을 겪고 건강도 좋지 않은 조부모님에게로 맡겨진 자매는 눈물을 달고 살았다. 이래저래 서러움이었다. 지금은 길룡리에서 대장노릇 하느라 잔소리가 그칠 날이 없지만.

"집에선 할 일이 없고 너무 심심해서 아홉시부터 나와요(센터차량은 10시20분이나 돼야 도착합니다). 집에 일찍가도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요" 라는 자매는 정말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자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이(가명)네 집에 들렀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아빠가 아이를 깨우나 보다. "언능 인나야." 품팔일도 없는 겨울날, 아빠는 술을 또 얼마나 드시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아빠는요. 술 먹으면 뚜드려 뿌셔요. 어휴~"

언어장애와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행복이의 말투와 행동은 과하고 격하다. 바지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마르고 여린 아이인데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 속 주인공인듯 어설픈 몸짓을 하루종일 해 댄다. 아빠의 알콜과 폭력이 아이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지 걱정이다.

세 아이를 먼저 데리고 센터로 들어오니 얼마 전 엄마와 이별하고 할머니집에 들어와 살게 된 형제가 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7살, 9살 남자아이들이 겪어내기엔 너무 힘든 일이다. 투정할 곳 하나도 없는 곳에서 여자아이들 괴롭히며, '나 힘들어요'라고 형제는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굴러온 형제돌들이 공부실력으로 센터를 제패(?)하고 있다. 텃세부리는 박힌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말썽도 피우고, 공부도 하며, 하루해를 보낸다.

제일 먼저 센터차량에 오르는 구수리 남매의 목소리는 근동에서 제일 클 것이다. 잘생긴 동네 아저씨같은 풍모를 지닌 4학년 기쁨이(가명)는 행복이와 같이 특수반에 다닌다. 나이는 같아도 덩치는 행복이 2배이고 목소리는 귀가 쩌렁거릴 정도다. 행복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빠쑈 빠쑈, 팍팍'해대도 기쁨이 목소리 한방이면 흔적도 없어진다. 4학년, 6학년 구수리 남매는 출석율로는 1등을 달린다. 6학년 누나는 요즘 풀이 죽어 보인다. 폭풍 사춘기를 거치는 남학생 4명에 혼자 여학생이기 때문이다. 2학기때 여학생 1명은 광주로 전학가고, 1명은 방학 때면 아빠가 계신 서울로 가버려서 외톨이가 된다. 그러다보니 동생들 틈에서 노는데 나이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 하다. 구수리 남매네도 가족모두 장애를 갖고 있다. 한 학년에 서너명이 전부인 학교를 다니다가 한 학년에 200명이나 되는 중학교로 진학할 누나가 걱정이다.

스물아홉 명의 아이들의 삶은 곱지도 풍요롭지도 않지만 다행히 맑고 밝고 훈훈한 심성을 타고난 듯 하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오신 아빠가 반갑기도 하지만 자기맘을 몰라주고 엇나간 행동을 하는 아빠를 피해 센터에 오는 아이에게 이곳은 '기댈곳'이다.
일분일초가 시끄럽고 수 없는 경계와 마주해야 하지만 아이들이 주는 건강한 에너지에 길용리가 들썩거린다.

"지난 4년, 하루하루 영화같은 날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민들레세상 때문에 제가 잘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는 감격어린 문자를 주는 아이들이 있는곳. 이곳은 시골 공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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