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진 교도·여주교당(논설위원)
체벌금지를 놓고 혼선이 벌어지고 있다. 몇몇 시도 교육청에서는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혔고, 교육과학부는 간접체벌은 허용해야 한다고 한다.
체벌은 교육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교육을 빙자한 폭력인가? 저는 체벌이란 기본적으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조상들이 사용했던 회초리이거나 신체를 이용한 것 모두 본질적으로는 폭력일 것이다.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주변 원어민 선생님들에게 한국교육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면 두 가지를 자주 이야기한다. 하나는 한국학생들이 지나치게 많이 공부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고, 하나는 각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체벌에 대한 놀라움이다. 특히 교무실에서 출석부로 학생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한 원어민 선생님은 '왜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학교 내 체벌은 폭력범죄에 해당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대종사께서는 인도품에서 자녀 가르치는 방법으로 심교와 행교, 언교와 엄교의 단계를 구분하여 함께 아울러 가르칠 때 착한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엄교는 자녀나 제자가 철없는 때에 부득이 위엄으로 가르치는 법이니 이는 '자주 쓸 법은 아니다'고 하신다. 엄교의 세부내용이 무엇인지 정전에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대종사님 행장을 읽다 보면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 대종사님의 엄교는 특별히 잘못한 제자를 바르게 지도하려는 마음으로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엄하게 꾸짖는 정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한국 교육 현실에서 심교(스승의 마음바탕을 따르게 함)나 행교(스승의 모범)는 놔두고라도 언교(말로 순순히 타일러 가르치는 것)마저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의 경험에 따르면 가르치는 이들에게 여유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본다. 제자와 대화를 나눌만한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가 없다. 현재 한국 교육 공동체는 대부분 명문고, 명문대 합격에 사활을 걸고 과도한 경쟁의 함정에 모두가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칙을 자주 어기는 학생을 가르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언교와 행교라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부끄럽지만 교단에 들어와 매를 든 적도 많았다. 비록 시간이 지났지만 저에게 매를 맞았던 제자들에게는 미안함뿐이다. 교육에 있어서 체벌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요즘 제 스스로 왜 매를 들 수밖에 없었는지 정리해 본다.

가장 큰 이유는 학생의 문제행동에 있기보다는 특정 순간, 화를 조절하지 못한 저 자신에게 있었다. 학생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괜히 내가 교사로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속 좁은 생각 때문이었다. 인격적 수양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역시 여유의 부족이다. 한참 업무처리 중이거나 수업준비, 행사 등으로 바쁠 때는 대화가 사라지고 따끔한 회초리나 매가 우선 나갔다. 더 부끄러운 점은 마음공부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경계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 스스로 화가 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회초리를 들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혈기 왕성한 초임시절에 학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매를 들었던 일들이 그 당시 제 인격의 미숙함을 그대로 비쳐주는 방법이었기에 이제는 부끄러움만 남는다.

체벌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되 장기적으로는 학생의 심성을 황폐화시키는 화학비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대화란 당장의 효과는 미미할지라도, 학생들 스스로 자존감을 세워주고 소중한 인격체임을 믿게 하는 유기질 퇴비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제자들의 대부분은 급한 마음에 엉덩이를 때리며 가르친 제자보다는 차를 앞에 놓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제자들이다. 다음 세대를 질 높은 사회의 인격적 주체로 만들기 위해서 심교나 행교까지는 어렵다하더라도, 언교 정도는 실천해야 체벌에 관한 논란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