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보다 어플

2016-06-09     민소연 기자
환자가 약자를, 주민은 교사를, 부모는 아이를 해치는 살벌한 세상이다. 압축된 불신과 농도 짙은 탐욕 속을 살아내는 어느 날, 나는 문득 낙원을 만났다. 익명 어플 '어라운드' 얘기다.

사랑 고백이나 이별 후 그리움, 넘치는 퇴사본능, 야식에 대한 반성, 괴로운 결혼 압박 등등 뻔하고 소소한 일상을 짧은 글로 나누는 '어라운드'. 이 어플은 애초에 익명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이 험악한 시대 하나의 무모한 도전으로 불렸다. 힌트는 거리나 연령대 뿐인데, 그나마도 공개하지 않을 권한이 있다. 그냥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 어디서도 못하는 부끄러운 고백들이 이 어플에 모이는 것이다.

내 또래들이 하는 고민들을 보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며 안심도 되지만, 정작 '어라운드'의 백미는 댓글에 있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늘 위로하고 응원하고 아껴준다. '면접에서 또 떨어졌는데 집에 못 들어가겠다'는 글에 '가족들은 라운더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토닥토닥', '저도 그거 열 번쯤 겪다가 취업했어요. 님도 얼마 안남았음!'라는 식이다. 왜들 착한 척이지? 하며 실눈 뜨다 이내 깨닫게 된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선한 것이었구나, 라는 걸.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우리들의 속내는 사실 위로받고 싶은 상처투성이 어린아이들이다. '어라운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이들이 서로를 안아주고 다독여준다. 익명을 무기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익명 속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따뜻해지는 것이다.

'어라운드'의 선한 세상 만들기는 더 나아간다. 손글씨로 위로를 전하는 진심엽서 프로젝트, 하루에 착한 일 하나 1일1선행, 팔찌를 구입하면 저소득층 후원도 되는 달콤팔찌 등등 자발적으로 따뜻한 태그를 붙이고 실천한다. '어라운드'의 오프라인 버전인 달콤창고는 지하철역 보관함에 만들어지는 과자와 응원쪽지 공간이다. 누군가 보관함 위치와 비밀번호를 공유하면, 그걸 본 사람들이 창고를 찾아내 선물이나 편지를 교환해가는 동화같은 구조다.

청소년 담당교무들에게 "마음공부 얘기도 올리고, 댓글도 달아주면 좋겠다"며 어플을 소개했다.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영성의 키다리아저씨가 마음공부란 태그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쎈 척이나 해대던 나도 달콤팔찌를 주문하고, 누군가의 고민에 따뜻한 댓글을 단다. 세상이 의외로 살만한 것임을, 타인을 신뢰하고 염려하며 아끼는 마음을 이 어플 하나가 종교보다 더 잘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