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맞는 맞춤복
참된 성품의 원리 밝혀 생사의 큰 일 해결
인과의 이치 드러내고 수행의 길 갖춤

▲ 홍숙현 교무
    광주전남교구 비아교당
대종사님께서 직접 쓰신 〈정전〉에 대한 부분을 말씀 드린다는 것이 참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쉽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한글로 직접 써놓았으니 그대로 읽고 이해하며 실천하면 된다는 생각이고 어렵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듯이 내 정도의 수행, 공부에서 그 분의 본의를 어떻게 잘 헤아려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금강경〉의 첫 귀절처럼 결국은 내 방식대로 듣고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편안해집니다.

"앞으로 어떤 성씨가 양반이 될 것 같으냐?" "앞으로는 김씨, 이씨, 박씨도 아니고 원만씨가 양반이다"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앞으로 시대의 방향을 눈뜨게 해주는 대종사님의 유머, 참 멋지고 재미있는 분입니다.

교법의 총설을 읽다보면 고정된 틀이 있지 않아 어떠한 것(시대, 대중, 생활)에서도 다 맞을 수 있는 '원만함'이라는 말로 귀결이 되는 듯합니다.

'불교는 무상대도(無上大道)라 그 진리와 방편이 호대하므로 여러 선지식(善知識)이 이에 근원하여 각종각파로 분립하고 포교문을 열어 많은 사람을 가르쳐왔으며,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나, 교문을 별립하여 오랫동안 제도와 방편을 달리하여 온 만큼 교파들 사이에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한 일이 없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다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원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라 이 어찌 제불제성의 본의시리요.'

〈대종경〉 서품3장에서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 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고 밝히시며 우리 교법도 무상대도인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법인 불법도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본의가 사라지고, 모든 종교도 그 제도와 방편만 남아 서로 소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로 인한 전쟁까지 치르게 되는 때에 이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중학교 때까지 다녔던 교회에서 하나님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에 낙망(왜 나는 안 믿어지지)과 불신(아니, 어떻게 무조건 믿어)으로 종교생활을 접었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우연히(?) 원불교를 접하고 훈련을 받던 중 마음이 열리면서 아이러니하게 제일 먼저 떠오른 귀절이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렇게 믿기 어려웠던 하나님의 말씀들이 '그렇지'하면서 다가왔습니다. 그 경험이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원리는 본래 하나인 제불제성의 본의를 만난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산종사법어〉 경의편4장에서도 밝혔듯이 지금 시대의 일반 정도는 어른의 이름(하나님을 믿어야 한다)을 빙자하여 달래야 하는 정도나 앞으로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의 지각이 장년기에 들어 천하의 인심이 원만한 공부법을 자상하게 경위로 밝힌 일원대도로 돌아오게 됨을 자신있게 선언합니다.

'그 중에도,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과거 불교의 제도와 방편이 지금 우리생활에 맞지 않고 어렵거나 불편하다면 원만한 대도라 할 수 없습니다.

〈대종경〉 교의품 24장 법문 말씀처럼 옛 경전은 이미 지어 놓은 옷(기성복)과 같아서 모든 사람의 몸에 고루 다 맞기가 어려우나 각자의 근기와 경우를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맞춤복의 법이 곧 원만한 대법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복잡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때에 간편하고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부법이 아니라면 너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문명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고 있으나 이에 반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아지는 것 같은 이 세상의 삶의 모습들과 세상 누구에게서도 이해와 위로 받지 못하고 공허함, 외로움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과 이 공허함을 대체하기 위한 집착, 중독(마약, 권력, 돈, 게임, 섹스….)의 모습으로 나약하게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와 대중과 생활에 맞도록 다시 법을 짜게 된 것이 우리 교법의 원만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인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사은(四恩)과 수양·연구·취사의 삼학(三學)으로써 신앙과 수행의 강령을 정하였으며,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상징 동그라미!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의 본래 고향(본원)이요,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께서 깨치신 이 동그라미의 원만한 진리가 나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겪고있는 생활 경계 속에서 활용되어야 대종사님의 교법이 이 시대에 맞는 맞춤복이 될 것입니다.

생활 속 경계들-심심, 지루, 화남, 질투, 공허함, 외로움 등-은 가까운 가족에게서 조차 받는 위로와 이해는 한계가 있으므로 결국은 원만한 교법으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과거와 같이 한편에 편착된 신앙, 편벽된 수행이 아니라 생활 속 경계로 마음공부하는 것이 곧 일원상진리의 신앙이요 수행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특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들-화, 질투, 외로움-도 내치거나 밀쳐버려 없애야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그 마음들도 사은이므로-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인과품 6장)로 받아들이고(신앙) 그 마음들을 겪어 나갈 때에 천지와 같이 심상하게 간과해 갈 수 있는 공부(수행)를 하는 것이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법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바로 활용해야할 원만한 공부법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경계들, 자 함께 공부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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