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는 너무나 억울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서부 병원으로 나를 옮겨 놓았으나 병원 의사들도 내가 경찰서에서 왔다고 처방을 하지 않았다. 이튿날 병실로 옮기고 소식을 들은 교구와 각 교도들의 주선으로 훈방되어 나왔다. 교당에 온 나는 교당 마련할 ...
대타원 박원석(戴陀圓 朴圓錫) 원로교무는 원기28년 6월 조희선 교도의 연원으로 남원교당에서 입교했다.박 원로교무의 어머니는 원기23년 상산 박장식 종사의 모친인 정형섭 교도의 연원으로 대종사를 뵙고 발심한 아버지와 같...
교당은 5개월 만에 기와집이 되었다. 이제 이사와 뒷마무리 외 청소, 마당 고르는 일이 남았다.교도들은 농사일이 너무 바빠서 교당 일에는 힘들었다. 마침 부안교당 학생들이 와서 봉사해 주었다. 그리고 원대에서 또 마포로 봉사활동을 나와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두 다 ...
나는 시골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큰 부담없이 교화를 하고 될 수 있으면 말을 조심히 하면서 살도록 가르쳤다. 왜냐하면 동네가 교회와 성당이 있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모이면 말이 많아졌다. 작은 동네라 금방 말이 퍼진다. 노인 할머니 집사가 있는데 그 분...
양로원에는 까다로운 할머니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 부모님이다' 생각하고 뜻을 다 받아 주고 3년 동안 잘 근무했다. 양로원에 살면서 덕진교당을 내려고 우리 법당에서 교도님 몇 분과 양로원 어르신 30여 명을 모시고 법회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고창으로 이동하...
수타원 김정근(秀陀圓 金正根) 원로교무는 원기38년 9월 도양교당에서 김인철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일찍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교당을 다녔기에 어린시절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백수 길용리에 가면 여자...
원기74년 경남교구 창녕교당 3대 교무로 부임했다. 교도는 많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교도 사종의무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교당 유지에도 많은 어려움은 없었으며 교도님들과 쉽게 적응이 됐다.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재미있게 교화를...
교도회장의 배려로 나는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이 무렵 전북교구 교도훈련과 교리시험이 처음 있을 때였다. 이때 동산교당 왕산 윤제덕 부회장이 최우수상을 받아 교당이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중앙총부에서는 전국학생 교리강연대회와 교리퀴즈대회, 연합회 회장 선출...
원기50년 중앙교구 함라교당 2대 교무로 부임을 했다.어느 지역이나 교화지는 비슷하겠지만 함라 지역은 많이 달랐다.시골 농촌 조그마한 면 소재지에 만석을 가진 부자가 셋이 살았다. 만석군 한 집에 150여 명의 식솔들을 거느린 양반마을이었다.종교도 백제무왕시대로부터 내...
원광여자중고등학교에 부임한 후 진타원 박제현 선진과 상산 박장식(원광남자 중·고교장)종사께 인사를 갔다. 상산종사는 '빙공영사 지공무사 선공후사'법문을 주면서 "어느 교화지가 되었든지 이 정신으로 표준을 잡고 교화를 하라"고 당부했다. 원광여고 설...
원기39년 6월 산서교당에서 박성석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경타원 김수인(璟陀圓 金修仁) 원로교무.출가이전 고향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고산마을에서 평온하게 자라왔다. 김달성 교무의 백모와 친어머니의 인연으로 원불교가 고향 마을에 들어왔다. 그리고 유장순 선진이 초대교무...
서울교당 이후 부임한 곳은 부안교당이다. 3대 교무였다.당시 부안교당은 일도 많고 빚도 많았다. 나는 교당 문간채를 팔아서 돈을 합하고, 교도들과 계를 했다. 박상윤 덕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채소를 잘 가꿔서 팔고,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팔고 그렇게 빚을 다 갚았다....
원기29년 11월 수지교당에서 정양선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감타원 박혜순(坎陀圓 朴慧順) 원로교무는 원기38년 장수교당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출가를 하겠다'고 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산 박장식 종사와 곤타원 박제권 종사 등 훌륭...
원기37년 도양교당에서 강순만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곤타원 심혜관(崑陀圓 沈慧寬) 원로교무. 당시 불갑교당 교도회장이었던 강순만 교도를 따라 익산총부에 총회를 보러왔다. 처음 온 곳이지만 '나 살던 곳이었네'하는 느낌이 들었다. 익산총부 첫 방문을 하고 '여기 ...
서광주교당에서 장흥교당도 냈다. 3년간 비포장도로를 3시간씩 다녔다. 서광주교당 회장이 판사였는데 장흥 '지원장'으로 오게 됐다.나는 "아무래도 뜻이 있어 장흥으로 좌천되어 온 것 같습니다. 이차에 장흥에 교당 하나 내십시오"라고 권유했다. 이에 ...
광주교당 부교무를 한 후 승부교당으로 교무 발령을 받았다. 이때가 25세였다. 승부교당에는 논이 있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농사를 짓나...
원기34년 김일선 교도의 연원으로 도양교당에서 입교한 김보신(曾陀圓 金普信) 원로교무. 그는 "대종사님을 7살 무렵에 뵌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구체적으로 생각 나지는 않으나 다녀간 적은 있다는 것이다."아버지는 신심이 대단했다. 대종사님을...
김성대 청년이 사법고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시 교무부장이었던 이광정 부장이 떠올랐다. 교무훈련 중에 교정원 각 부서가 사업보고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교무부장은 '박태선 장로는 주변에 법조인이 15명이나 있는데 우리는 청년 중에 법조인이 한명도 없어 ...
가는 곳마다 교화 외길터전 가꾸는데 오직 일념소중한 법연 이어져인천교당 부임해 보니 양식이 떨어져서 보리쌀 2되와 쌀 3되를 팔아서 근근히 교당 살림을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그 어려운 상황속에 15명으로 시작된 교화가 차츰 교도수가 증가해 남자가 3단, 여자가 7단, ...
초창 해운대교당 근무를 3년간 마치고 원기56년 37세로 이웃에 있는 김해교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다.당시 읍소재지인 김해는 김수로 왕릉이 있고 가락국 문화의 전통과 불심이 조화롭게 자리한 교화의 터전이었다. 초대교무이신 함타원 송영지 교무님의 뒤를 이어 선타원 한제선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