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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마지막을 혼돈의 죽음으로 끝낸다. 남해와 북해의 황제가 만났다. 중앙의 황제인 혼돈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자, 그들은 어떻게 보답할지 의논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통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 그러나 혼돈만 그런 구멍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뚫어주자.” 그들은 매일 구멍을 하나씩 뚫었고,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죽었다.장자의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북해의 큰 물고기가 변화하여 큰 붕새가 되어 남쪽 바다로 향해 간다. 새가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바탕에는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3.01.0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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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정(鄭)나라에 계함(季咸)이라는 영험한 무당이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이 살지 죽을지, 망할지 살아남을지, 운이 좋을지 나쁠지, 요절할지 천수를 다할지 그 날짜까지 예측해 꼭 신들린듯했다. 정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열자(列子)는 그를 만나고 돌아와 호자(壺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가 가장 높다고 생각했는데, 더 높은 자가 있었습니다.” 호자는 계함을 데려와서 자신의 관상을 보게 했다.그러자 계함은 “그대의 스승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요.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오. 열흘도 남지 않았소.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2.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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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안회(顔回)는 공자(孔子)에게 자신의 공부 정도를 말했다. 처음에 안회가 “예(禮)와 악(樂)을 잊었습니다”라고 말하자, 공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답했다. 다시 안회가 “인(仁)과 의(義)를 잊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다시 아직 멀었다고 했다. 시일이 지나고, 다시 안회가 “가만히 앉아서 잊었습니다[坐忘]”라고 말하자, 공자는 크게 당황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안회는 “저는 제 몸의 기관과 팔다리를 내려놓고 보고 듣는 작용을 내쳤으며 형체와 헤어지고 지식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통하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2.1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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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물고기가 물을 잊고 살아가듯, 사람은 도를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물고기가 한순간도 물을 떠날 수 없듯, 사람은 한순간도 도를 떠날 수 없다. 이미 도와 하나로 스스로 존재하니, 도와 한 몸으로 움직인다. 어느 하나 멈춤도 없이, 저 별의 운행처럼 그렇게 오고 간다.장자의 이야기 속에는 ‘유(遊)’가 여러 번 나온다. 일반적으로 ‘노닐다’로 번역하는데, 유희(遊戲)나 유람(遊覽)의 느낌으로 이해된다. 장자의 글에 나타난 예술적 감각과 정취를 생각하면, 이러한 해석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2.0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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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도(道)와 둘이 아니라면, 생사(生死) 역시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언제나 함께 있다면, 그저 하늘의 뜻과 함께할 뿐이다. 오히려 삶의 수고스러움을 놓아버리는 죽음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이 몸은 바람에 따라 일어난 물결처럼 잠시 생겨났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일렁이는 물결의 모양이 바뀐다 한들, 그 마음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다.장자는 죽음을 앞둔 지인(至人)의 이야기를 즐거운 듯 속삭인다. 한 지인이 병에 들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 지인은 “훌륭하도다! 저 조물자(造物者)여! 나를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2.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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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야기를 통해 넌지시 전한다. 남백(南伯)의 자규(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떻게 안색이 어린아이처럼 생기가 넘치는 것이오?” “도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오.” “도라는 것이 배울 수 있는 것이오?” “이런! 배울 수 없소.”여우는 도를 말로 전할 수는 있지만, 생각 너머에 있기에, 배움의 방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도를 깨닫는 과정을 설명한다. 과거 여우가 복량의(卜梁倚)에게 도를 말해주고, 그가 변화하는 모습을 이야기한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1.2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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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무릇 도란 그것만의 본질을 지닌 것이고 믿을 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함이 없으며(無爲) 어떤 모양도 없다(無形). 도는 전해줄 수는 있지만 내 것으로 취할 수는 없고, 붙잡을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도는 그 자체로 몸통이자 뿌리이며, 하늘과 땅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도는 귀신도 하느님(帝)도 신으로 만들며, 하늘과 땅도 낳았다. 태극(太極)보다 더 멀리 있으면서도 높다고 여겨지지 않고, 우주의 여섯 방위(六極)보다 아래에 있으면서도 깊다고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1.1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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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전체(全體)의 관점에서 존재의 본질을 생각한다. 우주 전체에서 보면, 어떠한 변화가 우주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주는 항상 그대로 있다. 범위를 줄여서 지구 전체로 보면, 그 안의 모든 동식물이 천만변화를 한다고 해도, 지구의 물질적 총량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개체로서 생멸은 피할 수 없다고 해도, 결국 다른 존재로 바뀔 뿐,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배를 골짜기에 보관해두고 물고기 잡는 그물을 늪에 보관해두고는 거기가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센 사람이 그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1.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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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 무섭고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장자는 생사의 문제를 하늘의 운명으로 내맡긴다. 왜냐하면 나의 몸이란 것도 실은 땅에서 와서 다시 땅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의 피와 살이 되며, 그 피와 살의 세포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나의 밖으로 나간다. 물질로 봐도 끊임없이 오고 가지만 어느 하나도 멈춘 바가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0.3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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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옛날의 참사람들은 하늘의 것을 사용해서 오는 것을 기다렸고, 인간이 하늘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옛날의 참사람들은 눈을 사용해서 눈을 바라보고, 귀를 사용해서 귀를 살피며, 마음을 사용하여 마음을 회복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공평할 때에는 목수의 먹줄에 들어맞는 듯했고, 변할 때에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였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것과도 하나였다. 그들은 하나일 때도 하나였고, 하나가 아닐 때에도 하나였다. 하나일 때 그들은 하늘의 무리에 속했고, 하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0.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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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성인은 정(情)이 없다’고 말한다. 의당 사람이면서 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의 본질적 요소로서 감각에서 비롯된 느낌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아마도 장자는 그 정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 요소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마치 착시 현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보고도 흡사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마땅히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이 참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문은 아닐까.오랜 세월 인간의 진화는 정보 처리에 있어서 효율성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 어떠한 것을 이미 경험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0.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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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있는 그대로의 앎은 무엇일까. 있음과 없음은 상대적 개념으로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없음은 존재의 부재(不在)를 말하면서 동시에 언제나 존재한다. 마치 숫자 0과 같다. 0은 분명히 존재하면서 다른 숫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0을 없다고 하면, 모든 계산은 성립되지 않는다. 0을 깨닫는 순간 수학의 힘이 나오듯, 있음과 없음이 상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존재함을 깨닫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앎이 나온다.오랫동안 유무(有無)는 현학(玄學)의 주요 문제였다. 논리적으로 생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10.1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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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하늘(天)과 사람(人)의 대비를 통해 참사람(眞人)의 의미를 말한다. 도는 하늘과 가깝지만, 사람에게는 멀다. 하늘에서 큰 것은 인간에게는 작은 것이고, 인간에게 큰 것은 하늘에게는 작은 것이다. 이렇게 하늘과 사람은 서로 대비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참사람은 그러한 하늘과 둘이 아니고, 사람이면서 또한 사람이 아니다. 참사람이 하늘과 둘이 아닌 이유는 텅 비어 있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하늘과 대비되는 사람은 물질적인 면에서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늘과 둘이 아닌 참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9.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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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모든 생각의 창이 열린다. 앎은 나 자신보다 나 이외의 것으로 향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희미한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앎이 커질수록 처음의 궁금한 생각,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은 잊혀간다. 보이는 것만 믿게 되고, 들리는 것만 믿게 된다. 실상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너머에 있다. 보이지 않아도 있으며, 들리지 않아도 있다. 문득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내가 안다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9.2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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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존재의 본질이 모양(形)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실제로 드러나는 작용이 없다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예컨대 비어 있는 공간이 없는 그릇은 그릇의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담아내는 본질적 작용을 할 수 없기에 그릇이라 할 수 없다. 사실 그릇은 형태를 통해 그 작용을 낼 수 있으므로, 적합한 비유는 아닐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사람의 모양을 한 인형은 아무리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진짜 사람은 아니다. 또한 죽은 사람 역시 사람이라 할 수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9.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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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성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고요한 물에 온 세상이 비칠 수 있다. 흐르는 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오직 고요하게 멈추는 것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멈춤, 그리고 바라봄. 장자가 말하는 성인의 마음에는 ‘나’라는 상이 없기에, 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 더하거나 빼는 것이 없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잡을 것도 놓을 것도 없다. 문득 일어나는 생각이 한없이 고요한 마음을 흔들 뿐이다. 그 생각 없이, 오직 기의 흐름에 따라 하나가 된다. 그렇기에 움직여도 움직인 바가 없고, 고요히 멈추어도 멈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8.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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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불구(不具)인 성인(聖人)의 이야기를 즐겨한다. 보통은 성인은 몸과 마음 모두에서 성인의 풍모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장자는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인 내면에서 성인의 품격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물의 모양은 그릇에 따르지만, 물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며, 정해진 모양 없이 주변의 상황에 따른다.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본질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장자가 생각하는 성인 역시 물과 같다. 그릇에 채워진 물이 중요하듯, 몸이라는 그릇에 채워진 성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8.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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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무더운 여름날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큰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나그네에 싱그러운 내음을 안긴다. 문득 나그네는 큰 나무의 삶을 떠올려본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 작고 여린 잎을 틔우고,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이 자리에 서 있겠지. 어쩌면 길지 않은 인간의 삶보다 더욱 긴 시간을 보내면서 지나가는 모든 존재에게 작은 쉼터를 내어주었겠지. 큰 나무는 오래 살아온 만큼 지혜가 깃들지는 않았을까. 당산나무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신(神)은 아닐까.장자도 이 나그네처럼 큰 나무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는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8.1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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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는 독자마다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선다. 나긋하게 소일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가, 문득 머나먼 우주의 끝을 보여주는 듯 신비한 광채를 보여주는 듯하다가, 알 듯 모를 듯 마음 너머의 깨달음을 툭 던지듯 하다가, 무상한 삶을 멍하니 바라보며 삶의 지혜를 읊조린다. 누군가는 이를 철학으로, 또는 선시(禪詩)로, 혹은 우언(寓言)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처세(處世)의 방편으로 삼는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실은 서로 다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속세를 잊은 듯 살다가도 세상에 나와서도 멋진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8.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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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에는 공자(孔子)와 안회(顔回)의 이야기도 여러 번 나온다. 당시에도 공자의 가르침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 공자를 빗대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우언(寓言)은 마치 이솝우화처럼 대상의 특성을 함축하면서 정말로 전하고 싶은 바를 넌지시 건넨다.안회는 공자에게 위(衛)나라에 가서 임금에게 가르침을 전하겠다고 청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렇게 하면 처형이나 당할 것이라며 만류했다. 그는 ‘덕은 이름을 떨침으로써 사라져버리고, 지식은 경쟁으로부터 나
생각의 심연 『장자』
김지법 교무
2022.07.27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