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은 원로교무, 자비 충만한 할아버지

"누구라도 대종사를 뵈면 법력에 휩싸이게 됐다. 12세 연상 김광선 선진도 제자가 됐다. 또 11세 연상인 유건 선진은 무릎을 꿇고 '종부주'라는 존호를 올렸다. 당시 유교 풍습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각개교절 법잔치 교리강습에서 송천은 원로교무가 대종사를 칭송한 첫 마디이다.

대종사를 직접 뵌 송 원로교무는 "대종사의 외모와 풍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아보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일까. 만나는 사람마다 감화를 시켜 교도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는 대종사와 정산종사와의 만남부터 소개했다. 정산종사가 경상도에서 스승을 찾아 정읍의 화해리로 왔다. 그곳에서 뜻밖에 대종사를 만났다. 두 어른이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훗날 정산종사께 여쭈었다.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첫 인상에 대해 "구도를 위해 여기 저기 다녔는데 대종사를 만나 이야기 하는 사이 법력에 감탄했다. 그래서 일어나 큰 절을 하고 형제의를 맺었다"고 말했다. 또한 "대종사님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가신 분이다"고 소개했다.

송 원로교무는 일제의 극심한 식민지 정책의 현장으로 대중을 안내했다. 그는 "끊임없이 순사(경찰)들이 출입했다"며 "예회나 야회 시 불쑥 불쑥 들어와 사람들이 놀래서 수명이 줄어들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또 "항상 엿듣고 있어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 경찰 황 순사가 입교를 했다. 대종사는 그의 법명을 이천(二天)으로 내렸다. 이에 대해 송 원로교무는 "황 순사가 두 세상을 볼 것이다는 뜻으로 이천으로 법명을 준 것이다"며 "마음으로 감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찌 순사가 입교를 할 수 있었겠느냐. 감시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줬다"고 소개했다. 대종사의 세밀한 인간관계의 한 면을 보는 듯하다.

당시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 했다. 출석부 점검과 황국신민서사를 모임 때 마다 외워야 했다. 이때 대종사는 황 순사에게 "나는 배우지 못해서 혀가 안 돌아가. 그래서 못 하겠어"하자 황 순사는 "그러면 그 암기 시간 끝나고 들어오면 된다"고 요령을 알려줬다. 이렇게 해서 대종사는 황국신민의 맹서를 피했다.

송 원로교무는 총부에 거주하던 아이들과의 기억을 떠 올렸다.

그는 "1학년 때 전투모를 쓰고 좀 늦게 예회를 보러 갔다. 마치 대종사와 마주쳐 한 선배가 '대종사님께 경례'라고 구령을 하자 전투모를 쓴 아이들은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대해 대종사는 "아이들이 질서가 있어 보인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예회 마치고 병이 나 보름만에 열반하신 것이다. 당시 아이들로써는 "마지막 경례가 됐다"며 대종사를 추모했다.

송 원로교무는 교리강습의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당시에는 선(禪)을 마칠 때 마다 깔깔대소회가 있었다. 대종사가 송 원로교무를 불러 "노래하나 해라"고 하자 그는 "노래는 못한다"고 했다. 이에 대종사는 "그럼 딱지를 쳐 봐라"하여 주머니에 늘 상비 된 딱지를 꺼내 친구와 함께 열심히 쳤다.

이때 대중은 손뼉을 치며 아이들이 딱지 치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런데 딱지가 대종사의 무릎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딱지치기에 온 정신이 팔린 송 원로교무는 대종사를 향해 "발 치워 봐, 발"하고 반말을 해 버렸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중은 대각전 천장이 들썩 거릴 정도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는 기억이다. 끝으로 송 원로교무는 "대종사는 직관력이 자유자재였다. 또 대중을 끌고 가는 능력이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