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비닐하우스의 성자, 대산 김대거'를 시청하고

▲ 조성연 교도 중흥교당
오늘도 아침을 깨고 일어나는 순간 깨닫는다. 지금 나는 어느 순간을 살아가는가. 잠시 어떤 기척을 느끼려는 듯 오감을 곤두세운다. 다만 그러한 일들을 기억할 뿐이고, 그러한 일들이 스쳐가는 동안, 여기 잠시, 내가 앉아있을 뿐이다.

다큐 '비닐하우스의 성자, 대산 김대거' 2부 영상은 대산종사께서 세계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종교연합기구 UR(United Religions)을 주창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교황의 표정은 사뭇 엄숙하다. 나는 인류의 표정을 본다.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에서 얼마 전 다큐 영화 '바보야'를 통해 느꼈던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헌신적이었던 한국의 현대사를 읽게 된다.

영상은 줄곧 대산종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간다. 나는 작품의 의도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아닌 것이 다행스럽다.

아프리카로 간 부처께서는 오늘도 오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와질랜드의 어느 돌담을 걷는다. 나도 어딘가 아픈 것 같다. 부스럼 딱지를 내밀고 김혜심 교무님이 약을 발라주실 때 엄살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 교무님의 엄한 꾸중과 달콤한 알약을 얻어먹기 위해 아프리카의 소년들처럼 그 줄 가운데에 서 있고 싶다. 나는 여전히 외롭고 우울한 날을 견디는 중이었으므로.

대산종사는 "허공을 네 것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날마다 마음을 경작한답시고 저 허공에 씨앗을 묻고 물을 대고 농약을 살포하지는 않았을까. 저 허공의 잡초를 뽑겠다고 날 선 호미를 찍어대지는 않았을까. 대체 나의 농업, 생산은 나의 것이었을까. 나는 저 허공을 돈을 주고 매입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저 허공을 너무 과식하지는 않았을까. 온갖 생각을 논리라 믿고서 거친 낙서를 해대지는 않았을까.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웅변하면서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저 우중충한 뒷모습은 나의 허공이 아닌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 '정말 좋은 세상은 종교라는 이름이 없는 세상'이라는데 정녕 사은(四恩)의 세상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의 사람살이가 배반과 야만, 그리고 협잡과 이기 등으로 여지없이 추악하게 변해가고 있음을 매우 불편한 심정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거기 아우성치면서 살아가는 군상을 어느 시인은 '대량생산된 공산물처럼' 이성과 감성이 박제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라고 탄식한다.
'세상 속에 함께 하는 활불이 되라'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아프리카로 간 부처'께서는 갑상선암과 위암 수술을 하시고도 여전히 불모의 땅에서 '꼬꼬김'으로 살아가고 있다. 당신의 텃밭에서는 온갖 씨앗들이 무성해지고 있었다.

일상은 여지없이 반복되고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휴식과 치유의 의자가 어디에 있기나 한 것인지 두리번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산종사께서는 다시 한 번 활불(活佛)이 될 것을 당부하신다. 평생 성자로 살아온 대산종사의 삶은 결국 온갖 생명체의 온전한 발육을 돕자는 비닐하우스의 삶이었으리라.

아직도 권력의 축은 이합집산에 의해 횡행되고 있으며 온갖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세상이지만, 나는 바란다. 해가 뜨는 아침이면 "굿모닝, 교무님!"하고 밝고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안겨드는 저 스와질랜드 까풍아교당의 아이들처럼 허공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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