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방에서 전신암 극복, 우주 원리 밝히다

▲ '신라의 미소'를 닮은 무초 최차란 도예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아카시아 향기가 달콤한 오월이다. 신록이 온 산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 넣은 듯 싱그럽기만 하다. 경주에서 우주와 흙을 고민하는 무초 최차란(86·법명 경천, 이하 무초선생) 도예가를 만나러 가는 길. 긴 겨울을 지낸 5월의 신록이 무초 선생을 닮았다. 수줍은 듯 삶의 고뇌를 마친 깊은 미소로 화답한다.
흙을 빚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 원불교새등이문화원(원장 이성택)에 도착했을 땐 봄 햇살이 서산에 걸린 늦은 오후였다.

흙을 통해 진리 연마

요즘 무초선생은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신라의 미소'를 띠며 반갑게 맞아 주는 그에게 사는 즐거움을 물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지구를 고민하고, 우주와 흙을 고민한다. 이것을 알기위해 도자기를 빚는다"며 "그 고민을 안 하면 가마에 불을 지폈을 때 완전한 그릇을 얻지 못한다"는 원리를 설명했다. 우주 원리를 연마하며 도자기를 빚는 그를 볼 수 있다.

우주가 생성된 원리를 물레의 회전 원리에 응용한 때문인지 그는 여섯 번 가마에 불을 지펴 한 점도 허실이 없이 다기를 완성했다. 그리고 불의 원리와 별의 원리를 붙여 차완(茶碗)의 이름을 붙였다.

새등이문화원 최현천 교무는 "수도인들이 죽을 때까지 도를 구하듯 무초선생은 흙을 통해 우주의 원리인 진리를 탐구한다. 즉 도자기를 통해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남들은 '도자기 하는 분이 뭐, 저런 걸 다 하나'고 말한다. 하지만 무초선생은 흙을 통해 우주 원리 연마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며 무초선생의 말을 쉽게 설명했다.

무초선생이 도예가의 삶을 살아오기 까지 과정을 듣고 있노라면 선사들의 구도과정과 비슷하다. 막사발을 빚어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찾아 헤매던 이야기, 홀로 고민하며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투병기, 한국의 차도(茶道)를 우주원리에서 생활세계까지 밝혀 대중화시킨 이야기 등. 그는 "극한의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할아버지의 현몽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할아버지는 '동학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이다. 그는 수운선생의 형인 최세우의 5대손이다. '무초(蕪草)'란 아호도 수운선생이 현몽해 준 것이다.

무초선생은 3대째 옹기를 굽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1971년 우연히 도쿄박물관에서 일본 국보가 된 조선초기 막사발(정호다완井戶茶碗)을 만나고 난 뒤 1974년 새등이요(史等伊窯)를 설립, 막사발 재현에 일생을 바쳤다. 또한 막사발 철학을 탐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다도 사범 자격증을 취득하고 1979년 한국차인회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몸이 도자기가 되다


무초선생은 20대에 폐병으로 한쪽 폐를 들어냈다. 35세엔 자궁암, 69세에 전신암에 걸리는 등 평생을 온갖 질병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물레 돌리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죽음을 체험했던 순간들이 궁금했다. 어떻게 극복해 냈을까?

그는 "80평생 살아오면서 성(건강)한 날보다는 아픈 날이 더 많았다. 특히 노구에 찾아온 전신암은 너무나 혹독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가마에 불을 때고 있을 때,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파리가 자꾸 그에게 달라붙는 것이다.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이웃 아주머니에게는 안 붙고 목욕을 매일하는 그에게 자꾸 파리가 달라붙었다. 그는 "훗날 그 이유를 알았다"며 "몸속이 썩고 있는 줄도 모르고 혼자 부황과 쑥뜸을 뜨면서 막사발 빛깔 재현과 〈회전이치 다도〉발간과 '들차회' 활동에만 전념했다"고 말했다.

그가 69세 되던 어느날, 몸에서 심한 냄새와 함께 선지빛 하혈을 했다. 순간 자궁암이 재발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자력병원으로 달려가 검사한 결과 '전신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 지주인 최제우 할아버지에게 기도했다. "할아버지! 제가 큰일을 할 수 있다면 살려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내버려 두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던 중 머릿속에 환상처럼 '황토굴에 약쑥을 깔고 불을 때고 누우면 전신 모공으로 그 약 기운이 스며들어 온몸 전체가 뜸을 뜨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는 황토굴을 짓기 시작했다. 벽의 두께는 40㎝, 지붕의 높이는 사람이 앉았을 때 머리 위로 주먹 세 개가 들어갈 높이, 넓이는 누워서 옆으로 두 바퀴 정도 구를 수 있는 넓이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죽을 각오로 황토굴에 들어갔다.

바닥온도는 110℃~120℃를 오르고 내렸다. 불을 얼마나 넣었는지 방바닥의 자리는 고사하고 약쑥과 그 위에 깔은 요도 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포가 죽어 있어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불을 더 넣으라"고 주문했다. 당시 그는 모든 마음을 비우고 "여기 있어도 죽고 바깥에 나가도 죽는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으리라"는 심경이었다. 황토굴에 들어가면서 그는 "내가 죽으면 그대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0일 간을 그토록 뜨거운 황토굴에서 몸을 구웠다. 이불도 타고, 자리도 타고, 몸도 탔다. 방바닥에 닿은 부분은 숯덩이처럼 까맣게 변했다. 그의 몸은 도자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황토굴에서 쪽문으로 식사를 넣어 줄 때 들어오는 찬바람의 유혹이 제일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20일이 지난 후 바깥으로 나왔을 때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상쾌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날처럼 시원한 바람의 맛을 본 날은 없을 것이다"고 회상했다.

그는 요즘도 무리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피곤해지곤 한다. 그럴 때 황토방에서 30분 동안 누워있으면 회복이 된다. 황토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본심본성을 연마한다

몸을 잊어 가며 차도를 연구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까.

그는 "모든 일을 할 때 원칙을 알고 진심으로 행해야 한다"며 "그 원리와 방법은 차도(茶道)의 원리에 다 밝혀 놓았기 때문에 후래 사람은 편할 것이다"로 일갈했다.

장사 속이 아닌 우주 원리에 따라 오랜 시간 예(禮)를 행하다 보면 그 뒤에 재물과 명예는 당연 따라온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는 요즘도 도막에 나가 성형을 한다. '본심본성'에 바탕한 '정호다완'의 재현의 완성을 위해서다.

무초선생이 설명한 우주원리와 차도 사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 할 때 그가 한마디 거든다. "다 됐는교. 저녁먹으러 갑시다." 먹는 일 역시도 우주 회전원리에 근원한 자연스런 발현인 것이다.

▲ 무초 선생이 기거하는 황토방. 도막에서 성형을 하다가도 피곤해지면 30여 분 휴식을 취하면 곧 몸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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