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산제법성지의 도학골 전경. 도학골은 석두암 맞은편이다.
▲ 원광선원 성리훈련에 참여한 선객들.

소태산과 산(山)
"산이로구나 산이로구나
층암절벽 산이로구나
천봉만학 좌우 산천
우뚝 솟아 높아 있고
물은 흘러 대해로다
일 년 삼백 육십 일에
사시절이 돌아와서
산도 또한 산이 되고
물도 또한 물이 되어
천지 만물 되었도다
이런 산수 어쩌다가 있었던고
내 아니면 이런 산수 있을소냐"


위 내용은 소태산이 대각의 절정에서 느낀 기쁨과 희열을 산수절경에 비유하여 예찬한 '탄식가' 중 일부다.

산(山)은 소태산과 인연이 깊다. 소태산은 당신의 호를 스스로 '소태산' 혹은 '해중산'이라 하고, 아홉 제자들에게도 산(山)자 항렬의 법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소태산의 탄생지이자 대각을 통해 교문을 연 근원성지는 영산이요, 교법을 초안한 제법성지는 변산이며, 전법성지 또한 익산이 아닌가.

소태산에게 산(山)은 어떤 의미일까?

"산은 힘의 상징으로 법력을 뜻한다. 숨어서 오래오래 적공하여 음부계에 인증을 얻어 양계에 드러난 것이 산이다. 그래서 박중빈은 다생겁래에 적공하여 대각을 하고 스스로 '소태산'이라 하였고, 창생을 위해 사무여한 정성으로 무아봉공의 경지에 이른 공인에게 법계인증의 의미로 산(山)을 주었다. 산의 주인은 금강의 도리를 깨쳐서 활용하는 각자(覺者)이며 제중할 능력을 갖춘 법사"라고 박용덕교무는 말한다. 〈금강산의 주인되라〉참조

백학명선사는 소태산을 "하늘을 뚫는 절정의 산이여! (透天山絶頂)" 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후천개벽의 여래로 오신 소태산의 그 인품과 법력의 깊이를 어찌 감히 사량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성지에서 첩첩이 층암절벽을 이룬 내변산의 산경을 보고 있으면 '탄식가'의 위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물동이로 쏟아 붓듯 퍼붓던 지난 장맛비에 여러 곳이 많은 피해를 입어 안타까웠지만 이곳 실상동 계곡은 사방이 크고 작은 하얀 폭포들로 장관을 이루고 골골이 물안개가 피어나 그대로가 선경(仙境)이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석두암 터에 오르니 스승님은 오늘도 내게 '만법귀일'의 소식을 묻고 계신다. 아마 그 해 여름도 큰비가 내린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층암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사방 산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그 광경을 한 참 동안 보시던 스승은 "저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지금은 그 갈래가 비록 다르나 마침내 한 곳으로 모아지리니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소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셨다.(성리품 10장 )

이 산중 풍경은 그대로가 우주 법계의 소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눈 멀어 깜깜한 어둠속에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산이고자 할진데 그 자리를 스스로 깨쳐 아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도학골과 이진사이야기

제법성지 맞은편에 보이는 골짜기는 바로 이진사가 도를 이루었다는 도학골이다. 선진들에 의하면 이진사 이야기는 소태산께서 평소 자주 사용하던 예화라고 한다.

옛날 이진사라는 사람은 본시 부안 줄포리에 살았던 유학자로서 불교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봄날 화전놀이를 다녀오다 비를 만나 내소사 법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게 된다. 그 때 안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읽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대방광불화엄경이 다 뭐야" 하고 빈정거렸다.

그런데 비가 그치고 집에 돌아온 이진사가 낮잠을 자다가 그만 머슴들의 장작 패는 소리에 까무러치고 말았다. 식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죽은 이진사가 어느 길을 가다가 신선 둘이서 바둑을 두고, 또 한 명은 옆에서 훈수를 두는 것을 보았다. 이진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좋은지 "나도 당장 저런 옷을 입고 바둑이나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때 마침 흰 도포차림의 신선이 옷을 벗어 이진사에게 건네며 자기 대신 바둑을 두라고 하였다. 이진사가 좋아서 얼른 그 옷을 받아 걸치려고 하는 순간 공중에서 "대방광불화엄경 한 번만 외워도 축생보에 떨어지지 않거늘 너는 어찌 축생의 가죽을 둘러쓰려고 하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이진사가 깨어나 보니 자기가 죽었다고 가족들이 곡을 하고 있었다.

다시 살아난 이진사가 생각되는 바가 있어 집안을 살펴보니 마침 강아지 세 마리가 방금 태어났는데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이것을 본 이진사는 불법을 무시한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며 그 길로 출가를 단행, 바로 내변산 도학골로 들어간다. 후에 이진사의 부인과 자녀들이 물어물어 도학골을 찾아오지만 그 소식을 듣고 이진사는 가족을 만날 수 없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전설 때문에 이곳이 도학골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는 어쩌면 예부터 많은 도꾼들이 찾아와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는 내변산에 대한 상징적인 설화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변산은 영적인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은 이 도학골을 바라보며 도를 말하고 도의 길을 설했다.

이번 제법성지 원광선원에서 열린 제 4회 성리훈련은 숙소관계로 안타깝지만 많은 선객들을 제한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성리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깊어지고, 도학골을 찾는 새 회상의 도꾼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변산이 노출될 때 천불만성이 난다", "변산 바위가 드러날 때 콩 튀듯이 도인이 나온다"한 소태산의 예언을 다시 새겨보게 된다.

<변산 원광선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