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고,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원불교의 수행이라고 소태산대종사께서는 밝혀주셨다. 일원상은 결국 마음이다.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眞佛)이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眞法)'라고 보조스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헤매고 있다. 진리는 성인에게나 있고, 부처는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유교는 성인이 되는 가르침이고, 불교는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고, 도교는 진인이 되는 가르침이다.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목표이고, 부처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중국의 임제선사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말했다. 즉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다. 이것이 웬 날벼락 같은 말인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부처님과 조사를 죽기 전에 단 한 번 만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임제선사는 "살(殺), 죽여라"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잘못된 길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부처님을 만나고 조사를 만나 그들에게 의지한다면 스스로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대상화된 신앙은 결국 길을 잃고 헤매게 할 뿐이다. 대종사님께서 등상불을 없앤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는 가짜 부처이다. 물론 일원상도 가짜 부처이다. 일원상은 상징일 뿐이다. 진짜 부처는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가짜 부처인 등상불을 찾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진짜 부처가 우리의 '마음'임을 알려주기 위해 형상이 없는 것을 임시로 형상화 하여 일원상(○)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소견을 굳게 지닌 채 불도(佛道)를 구하는 모든 사람은 헛된 수고를 반복할 뿐이라고 말한다. 몸과 팔을 태워 부처님께 바치거나, 피를 내어 경전을 쓰거나, 눕지 않고항상 좌선을 하거나,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수행을 하거나, 팔만대장경을 다 읽거나, 가지가지 고행을 하더라도 결국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이 헛수고일 뿐이다.

부처님은 내 안에 있다. 천당도 지옥도, 행복도 고통도 사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위대한 스승은 그것을 가르쳐 줄 뿐, 진리는스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단하천연은 석두희천스님에게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직접 깎아준 석두스님이 단하에게 법을 설하려 하자 단하는 두 손을 올려 귀를 막아버렸다. 스승이 들려주는 어떠한 법설도 단하는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진리는 스승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음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종경〉 교의품 6장에서 대종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저 표본의 일원상으로 인하여 참 일원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며, 일원의 참된 성품을 지키고, 일원의 원만한 마음을 실행하여야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합치되리라"고 하셨다. 대종사께서 강조한 '참 일원'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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