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경전은 서분과 정종분과 유통분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종분은 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수심결'의 정종분은 모두 9개의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문답식의 서술방식을 중요한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독자로 하여금 그문제에 집중하도록 하는데 효과가 뛰어나다. 보조스님은 이러한 문답식 서술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권수정혜결사문〉은 7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으며, 〈원돈성불론〉은 5개의 문답, 〈간화결의론〉은 6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경전을 읽을 때는 우선 전체의 질문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여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수심결'의 첫 번째 질문의 내용은 이렇다.

"만약 불성(佛性)이 현재 이 몸에 있다고 하면, 이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날 리가 없는데 저는 어째서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잘 해석하여 나로 하여금 속속들이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불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선(禪)의 목표이다. 또 '본래성불(本來成佛)' 즉 누구나 이미 부처가 되어 있다는 말은 앞에서 이미 들어서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니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미 부처라면 불성이 분명 이 몸 안에 있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하는 의심이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는 사람은 '의심'이 걸려야 한다. '의심'이야말로 마음공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의심'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야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은 제자들이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면,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질문에 '의심'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뿐이다. 그것을 '반질(返質)'이라 한다. 질문을 당사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소림사에 있는 달마를 찾아온 혜가를 달마는 좀처럼 만나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혜가가 간절한 구도심으로 팔을 자르고 나자 그를 맞이하게 된다.

혜가는 "마음이 괴로우니 그것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묻자마자, 달마는 "그 괴로운 마음을 가져와 보라"고 하여, 오히려 질문을 혜가에게 되돌려 준다.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그 마음을 찾다가 혜가는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 이는 7살짜리 어린 박중빈의 의심이다.

그리고 이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대각(大覺)을 이루어 소태산대종사가 되셨고, 그 결과 지금의 원불교 회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의심'이야말로 공부인의 생명줄이다.

나는 부처인데 지금 나는 부처가 아니니, 도대체 진정 나는 부처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이제 독자들 모두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왜 나는 보지 못하는가?'하는 이 첫 번째 의심에 푹 빠져보도록 하자.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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