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은 인생 초년에 빈천했지만 말년에 부귀한 경우이다. 국내에선 정주영 현대그룹 전회장이 그러했고, 해외에서는 세계적 갑부 워렌 버핏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가난하여 세끼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고, 버핏은 가난을 극복코자 1956년 투자를 시작,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의 부귀를 이루었다.

〈수양연구요론〉에 밝힌 74항 문목은 지난번 73항 문목에서 밝힌 바, 초년에 부귀하다 말년에 빈천한 이유에 대한 것에 반대되는 항목이다. 초년에 빈천하다고 해도 말년에 부귀하다면, 초년에 부귀하다 말년에 빈천한 것보다는 그래도 결과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부자로 살다가 가난한 것보다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로 사는게 훨씬 좋지 않은가?

초년과 말년은 이생과 내생으로도 풀어볼 수도 있다. 이생에 빈천하게 살았지만 선연 작복의 생활을 지속하여 왔다면 내생에는 틀림없이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은 〈대종경〉에서 말하기를 "전생에 초년에는 부지중 악을 지었으나 말년에는 참회 개과하여 회향을 잘한 사람"(천도품 35장)을 거론하며, 인과론적으로 참회 개과하여 내생의 부귀한 삶을 유도한다.

그렇다고 세속적 부귀를 일방적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현대인이 꿈꾸는 부귀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부귀를 욕심내지 않고 안빈낙도를 선택해서 성자로 존대를 받고 있고, 석가모니 역시 이생에 부귀함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여 영원한 도락을 얻고자 하였다. 부귀의 허망함을 알았기 때문에 구도의 깨달음을 얻고 불멸과 인과의 이치를 발견하여 세계의 성자가 되었으니 영원한 세월에 부귀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각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하면 초년에 빈천했더라도 말년에 부귀하게 살 수 있는가? 부귀 빈천되는 것이 다생겁래를 왕래하면서 불공 잘하고 못하는데 있으니, 복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 천지만물 허공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숭배한다(〈대종경〉, 교의품 14장)고 하였다. 우리가 선호하는 부귀는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유심조의 원리에 따라 작심(作心) 수행을 통해 부귀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하는 것이다. 〈월보〉38호의 '원각가' 가사를 보자. "빈천 중에 작심하면 부귀올 날 또 있으며, 번민고통 하는 동무 조롱하여 웃지마라." 설사 당장은 빈천하다고 해도 수행 적공하고, 정성으로 노력하면 부귀의 길로 인도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부귀 빈천에 비굴하지 않는 낙도생활을 하는 것이 요구된다. 정산종사는 〈법어〉에서 "빈천을 당하매 거기에 구애되고 부귀를 당하매 거기에 집착하여 길이 빈천을 초래한다"(원리편 35장)며 이로부터 해탈된 삶을 주문하고 있으니 반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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