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은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소리를 통해서 불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보조스님은 세 가지로 대답하고 있다.

첫 번째 대답은 '작용하고 있는 것이 곧 불성이다(作用卽性)'라는 것과 그것을 깨달은 두 가지의 예화로서 '이견왕과 바라제존자의 대화' 그리고 '어떤 스님과 귀종화상의 대화'를 들고 있다.
보조스님은 "불성은 묻고 있는 그대 몸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데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하루 종일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도 알고, 혹 성내고 기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서 된 것으로서, 그 바탕이 완고하여 감정이 없는데 어찌 능히 보고, 듣고, 자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자각하는 그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선은 견성(見性)을 통하여 성불에 이르는 것이다. 불성을 '봄(見)'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봄의 대상으로서 불성(性)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내안에 있는 불성을 찾아야 한다. 불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이 뭣고(是什麽)'하는 화두가 바로 그 불성을 묻는 것이다. 그놈은 나의 모든 감각과 의지작용을 주관하는 주인공이다.

그러기에 배고프고 목마른 것, 슬프고 기쁜 것, 옳고 그른 것 등을 분명히 알고 있는 즉 작용하게 하는 주관자이니 작용하는 속에서 그 불성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성이란 육체적인 것인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육체적인 것이라면 육체의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는 유물론적 견해이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뇌 과학'이 바로 유물론의 가장 진화된 형태이다.

그러나 육체는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유한한 것이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육체적인 것이라면 막 죽었을 때 장기의 손상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육체적 산물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불성의 성질에 대하여 〈원각경〉이나 〈능엄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만약 육체에 불성이 없다면 외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허공은 법은 설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임제스님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그대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없는 한 물건(勿形段者)만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

보조스님은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의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매 비록 육근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더라도 진여의 성품은 아무 것에도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라는 대목을 보고서 첫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불성'이며 '형상없는 한 물건'에 대한 자각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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