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변산 입구에서 본 인장바위. 코끼리를 닮은 형상이다.
▲ 일원대도비 입구에서 본 인장바위.
성지의 9월


연일 물폭탄을 퍼붓던 여름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급행열차를 타고 홀연히 떠나간다. 바람의 향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사이 숲속엔 노란 마타리가 긴 목을 내밀고,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목숨들이 바쁘게 씨앗을 준비하고 있다.

뽑고 뽑아내도 어느 틈에 다시 자라고, 씻겨 내린 토사로 뿌리까지 드러나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로 열매를 맺고 있는 잡초들이 처연하다. 생명이란 한없이 나약하면서도 또한 한없이 강하고 질긴 것을,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 쓰는 저 풀 한포기가 가엾고 때론 그 질긴 생명력 앞에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9월의 문턱에 선 제법성지에는 한 발 앞서 가을이 다가온 듯 석두암의 느티나무로부터 지친 초록 너머로 벌써 갈색 빛깔이 돌고 있다.

9월(원기6년)은 석두암을 준공한 달이다. 김남천 송적벽의 발의로 시작한 석두암 초당을 2개월 만에 완공하고 소태산은 거처를 실상초당에서 석두암으로 옮긴다. 소태산은 이곳에서 새로 초안된 교강과 교서를 여러 사람에게 근기따라 시험하며 교도들의 정법의 이해정도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점점 불어나는 교도들의 관리를 위해 10인 1단의 조단교화(組團敎化)를 처음 시도해 본다. 변산 시절 소태산은 이렇게 '모든 이로 하여금 바로 대도에 들게 하는 원만하고 간명한' 교법을 짜기 위해 대중에게 법의 이해정도를 끊임없이 실험하며 고심했음을 역사의 행간에서 자주 느끼게 된다.

인장바위와 소태산의 제도 방편

제법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은 성지 앞에 마주보이는 인장바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대종사님!"을 외치며 지장을 찍곤 한다. 그러면 그 우람한 바위가 엄지손가락 하나로 충분히 가려져서 마치 심인(心印)이라도 찍은 듯 결연한 표정들이다.

도장처럼 생겼다하여 '인장바위'라 부르는가 하면 일명 코끼리를 닮은 듯 '코끼리 바위'로 불리기도 하는 이 바위는 언제나 성지를 든든히 수호하고 있는 호위무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성지를 향해 묵묵히 경배하고 있는 한 수행자 같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인장바위야말로 소태산의 포부와 새회상 교법의 태동을 그대로 지켜본 산 증인이 아닌가. 물론 그곳의 변함없는 산천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거기 진리인증의 징표처럼 서 있는 그 바위를 우리는 제법성지에 포함시켜 생각한다.

소태산은 이 인장바위를 통해 선승의 제도 방편을 깨우치는 비유 설법(실시품 2장)을 길어 올린다. 참선을 하지 않는 제자를 크게 나무라는 노승들(학명과 만허 두 스님이라고 함)의 하소연을 듣고 소태산은 앞의 인장바위를 가리키며 "제가 지금 스님들께 저 인장바위 속에 금이 들어있으니 금을 채굴하라면 제 말을 믿고 인장바위를 부수고 금을 채굴 하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는 선승들에게 소태산은 두 가지 의미로 그들의 고정된 사고를 깨트리며 참된 제도의 방편을 전해주게 된다.

첫째는 '확신도 없는데 강제 채굴을 권하면 금을 채굴할 수 없듯이 참선에 대한 취미도 모르고 발원도 없는 상좌에게 억지로 참선을 권하는 것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영영 참선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하심이며, 또 하나는 '바위 속에 금을 내가 먼저 채굴하여 잘 활용하면 그것을 보고 그 사람도 스스로 금을 채굴하여 쓸 것이니 먼저 실행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 이 제도의 마땅한 방편'이라는 말씀이다. 송도성은 이 법문 마지막에 "참으로 광대무량 합니다. 선생의 제도하는 방법이여!" 라고 감탄한 두 노승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 〈월말통신〉 30호 '제도하는 법'-

소태산의 제도 방편의 핵심은 곧 남의 원 없는 일을 강제로 권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할 것이며, 내가 먼저 솔선수범으로 실행하여 상대가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법이다. 이 같은 소태산의 제도 방편 사상은 '솔성요론' 15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장바위를 보며 우리는 소태산의 사람을 제도하는 방편에 대해서 묵상해 본다. 종교란 결국 그 교리나 교의가 말과 뜻에 있지 아니하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원기 백년, 우리들의 핵심과제인 교화대불공도 실천을 통하여 내가 먼저 바로 서는 것이 교화의 제 1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장바위 앞에서 우리는 말에 앞서 소태산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에 대해서 물으며 다짐의 심인을 찍어보는 것은 어떨까!
▲ 용두샘.
용두샘과 깨진 차탕기

'용두샘' 하면 동화처럼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주산 송도성 종사가 16세에 형인 정산종사의 인도로 변산에 들어와 스승의 시봉을 전담할 때다.

하루는 아침 식사 후 스승에게 차를 올리고 난 도성이 차 그릇을 씻기 위해 용두샘으로 들고 나갔다. 그런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는지라 스승은 궁금하여 샘가로 나가본다. 그 때 도성이 우물가에서 차 탕기를 잡고 실심하여 앉아있는 것을 보고 스승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도성은 "사부주님, 제가 부주의해서 차 탕기 꼭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라고 이실직고 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이미 깨진 걸 어쩔 것이냐 실수로 깨뜨렸으니 앞으로 조심하기로 하고 그만 들어오너라" 고 한다.

이 후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부할 때면 이렇게 매사에 정성스럽고 진지했던 도성의 이야기를 곧 잘 비유하며 "도성이 깨진 그릇 붙이듯 하라"고 말씀하셨다. 용두샘 우물가에서 깨진 차탕기를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며 안절부절 애를 태우고 있는 소년 주산의 순진 무수한 모습이 떠오른다.

또 용두샘은 도성이 스승의 식사를 위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쌀을 씻던 곳이기도 하다. 도성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시 꽃발신심이 충천하던 정세월 선진은 도인을 닮아가기 위해 집에 돌아가서도 그렇게 머리를 흔들며 쌀을 씻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원대도비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용두샘은 소태산 당대에 사용하던 유일한 우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관리가 어려워 식수로 사용하지 못하고 성지 기도실에서 허드레 물로 간간히 쓰고 있다.

언젠가 이곳이 성역화 되는 날, 용두샘은 다시 맑고 깨끗한 영혼의 샘물이 되어 우리들의 목을 축여줄 것이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선진들의 이야기와 함께….

<변산 원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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