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에서 볼 때 죽음은 축제의 장이었죠'

▲ 쉼 박물관 창립자 박기옥 고문.
"모든 인간은 누구나 '탄생의 문(門)'을 통과하여 이 세상에 나왔지만 결국 '마침의 문(門)'을 한 번 더 지나가야 한다."
이 말은 쉼 박물관을 대표하는 문구이다. 하늘이 높아만가는 가을의 문턱에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특별한 곳, '쉼 박물관'을 방문했다.

쉼 박물관은 북악산과 인왕산이 병풍처럼 두른 홍지동의 주택가 언덕에 자리했다. 조선시대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했던 홍지문이 내려다보인다. 그 아래로 홍제천이 가을의 맑은 하늘만큼 깨끗이 흐르고 있다.

진정한 '쉼'으로 가는 길

쉼 박물관 설립자 박기옥(76)고문은 갑자기 대장암과 간암으로 사망한 남편을 통해 죽음을 새롭게 인식했다. 그는 "죽음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구나. 결국 삶의 연장으로 진정한 쉼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는 깨달음이었다. 이후 박 고문은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달리했다.

남편이 떠난 집에서 홀로 1년을 살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자녀들 유학생활을 도우면서 보아온 외국의 사례가 스쳐 지나갔다. '주택가에 박물관이 있다'는 점이다. 생각이 여기에 머물자 그는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네 자녀와 상의했다. 두 자녀는 반대를 했다. 그러나 두 자녀는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시라"는 응원했다.

2007년, 남편의 열반 1주기가 되던 10월8일. 그는 쉼 박물관을 개원했다.
당시 개원식에 함께했던 문화계 지인들은 "전통 상례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을 누가해도 해야 할 시점에 너무 잘 했다. 특히 1세대가 이뤄놓으면 다음 세대에서 사라지기 쉬운데 설립자의 막내딸이 문화 사업을 이어 받아서 할 수 있어 참으로 행운이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당시를 회상하던 박 고문은 다시 남편이 최후를 준비하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대장암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며 "건강했던 몸이라 암세포도 빨리 퍼져 위암까지 전이될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남편은 죽으면 부고장도 내지 말고 부의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었다"며 평소 좌우명으로 삼았던 '덕불고(德不孤)'를 설명했다. '평소 덕을 베풀지 않으면 외롭다'는 뜻이다. 지금도 박물관 현판엔 남편의 좌우명인 '덕불고(德不孤)'를 걸어뒀다.
▲ 민속품 수집의 인연을 맺게 된 칠선녀 목각인형.

칠선녀 목인과의 인연

박 고문은 이화여대 사학과 1기로 입학했다. 사학과를 다닐 만큼 민속품을 좋아했다. 그는 민속품을 하나 둘 모으던 중 인사동에서 칠선녀 목각인형에 매료됐다. 녹색, 주황색 저고리에 한복치마를 갖춰 입은 칠선녀 목인은 알고 보니 상여에 부착됐던 것이었다.

인사동이나 골동품 가게를 다니며 떡살, 나막신, 호롱, 소반 등 전통 민속품이라면 무조건 샀다. 다른 사람 손에 들려가는 것을 보면 부러움에 먼저 사기도 했다. 단골이 되다보니 민속품에 관한 물건이 나오면 바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사고 또 사다 보니 그는 어느새 민속품 사용이 생활화 됐다. 긴 옷은 붙박이장에 정리하고 작은 옷은 보자기에 싸서 반닫이에 넣고 생활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싫은 내색을 하던 남편도 후에는 지인들에게 아내의 민속품 사랑을 말해 선물로 기왓장을 들고 왔다. 또 남편은 후배가 줬다며 호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청동화로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전시된 진열장을 열어 보이며 물품 하나하나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의 민속품 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껴진다.
▲ 안방에 전시된 상여. 화려한 오방색으로 장식돼 보는 이로 하여금 '망자가 극락왕생의 길'로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안방엔 상여, 거실엔 요여

쉼 박물관은 이렇게 모은 민속품 하나하나를 소박하게 전시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양쪽 신발장이 놓였던 자리에 유리관 선반을 놓고 도깨비 목인(木人)과 명부사자 목인을 전시했다. 절(寺) 입구의 사천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왼쪽 입구에는 어촌에서 사용했던 인어목인을 볼 수 있다. 육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한 목인들이 전시돼 있다.

안방으로 가는 길엔 요여(腰輿)가 있다. 망자의 혼을 태운 가마로 장례 행렬시 상여보다 앞서간다. 장례를 마치면 육신은 산에 묻히지만 그 혼은 이 요여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빈소에 머문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박 고문이 안방으로 사용하던 자리엔 상여가 화려하게 장식됐다. 외국인들은 이 상여를 보고 "혹 혼례 때 사용하던 가마이냐"고 묻는다. 그만큼 선조들은 죽음의 의식을 축제로 승화시켰음을 볼 수 있다.

상여에 함께한 목인도 다양하다. 청룡과 황룡, 다수의 사람들과 갖가지 동물들. 익살스런 표정의 목인은 죽음으로 가는 영혼도 즐겁게 보냈음을 말해 준다. '늙어진 몸 벗어던지고 새 몸으로 다시 올 수 있으니 가는 길이 축제가 아닐 수 없다.'

안방을 지나 드레스룸과 화장실엔 용수판이 전시돼 있다. 용수판으로 상여가마의 앞뒤를 장식한다. 자세히 보면 양반가와 서민가의 용수판이 다르고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용수판이 서로 다름을 찾아 볼 수 있다.

2층에는 날(새)것을 전시했다. 새는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의 비상을 상징한다. 또한 새는 신의 사자로서 예시자, 전달자이며, 천상과 지상의 연결자이다. 상여에서 많이 쓰이는 새는 지상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일을 한다.

최근 쉼 박물관엔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 시니어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서울 시내 복지관 별로 문화 관람을 신청해 온다. 어르신들은 "쉼 박물관을 통해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는 소감을 방명록에 남기기도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인근에 있는 상명대 학생들까지도 쉼 박물관을 찾는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마당을 지나 작은 카페에서 '쉼'을 정리하는 시간. 죽음은 사람에 따라 아쉬움, 억울함, 서러움, 기쁨, 영광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삶일까?' 짧은 시간 큰 감동을 주는 참 따뜻한 박물관이 이웃에 있음에 감사하다"는 방문객의 말처럼 그곳에 가면 선조들의 '인내천(人乃天) 사랑'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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