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
월명암 주지 백학명 선사는 항상 소태산대종사께 세상에 나가 중생 제도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 소태산대종사는 웃으며 말했다.
"못 가에서 물고기를 바라느니 물러가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臨淵恙魚 不如退結網)란 말과 같이 제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곧 중생 제도입니다."

또 어떤 때는 "선리(禪理) 소식을 통했다는 분이 어찌 비록 모태 중에 있으나 중생 제도를 마쳤다는 뜻을 모르시오?" 라고 농담으로 돌리기도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원기8년 모친상을 당하여 치상 절차와 영산원 건축을 마무리 한 후 전주 청수동(현 교동)에 임시출장소를 정하고 회상 공개에 관한 취지규약의 작성과 인쇄의 제반 준비를 한 후 5개월여 만에 봉래정사에 돌아와 백학명 선사를 만나 하산할 뜻과 불법연구회의 창립취지와 그동안의 경과를 말했다.

학명선사는 일찍이 소태산대종사의 회상 창립을 은근히 종용해오던 터이라, 대단히 기뻐하며 자신도 변산을 떠나 정읍 내장사 주지로 가게 된 내력을 이야기했다.

학명선사는 내장사에서 소태산대종사가 주장하는 주작야선과 영육쌍전 주의(主義)를 실현하여 자작자수의 정신으로 일대 혁신선원을 만들어 소태산대종사께서 지도하여 주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학명선사의 계획은 내장사 대중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태산대종사는 내장사에서 나와 경성에 가기 위해 김제와 전주를 경유하여 원기9년 3월30일(음 2월25일) 아침, 이리역에서 경성행 기차를 탔다.
수행원은 정산종사·서중안·전음광, 경성 길 안내는 최도화가 맡았다.

최도화가 원기8년 가을, 구례 화엄사에 불사를 하러 간다는 50대의 여인 박사시화를 기차에서 만났다. 최도화는 당래 미륵존불 출현의 소식을 그 여인에게 전했다. 그가 매우 기뻐하며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소태산대종사의 일행은 저녁때 경성역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 최도화가 박사시화를 찾아갔다.
박사시화는 창덕궁 옆 계동에 사는 쌍둥이 자매인 박공명선의 딸인 성성원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박사시화는 그들과 상의하여 소태산대종사를 임시로 성성원의 집에 모시기로하고 소태산대종사와 일행을 모시고 왔다.

박사시화는 즉석에서 소태산대종사에게 귀의하여 경성의 첫 제자가 됨과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하였고, 박공명선도 귀의했다.

성성원의 집에서 삼사일을 머물고 경복궁 앞 당주동(현 세종문화회관 뒤)에 한 달 계약으로 집 한 채를 임대하여 소태산대종사와 일행은 거처를 옮기고 '경성임시출장소'로 정했다.

경성임시출장소에서는 박사시화와 박공명선 자매가 소태산대종사의 시봉을 담당했다.

음력 3월 어느 날, 박사시화가 가회동에 살고 있는 이궁가(李宮家)의 여인인 이동진화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박사시화가 전라도에서 온 생불님을 만나 뵙자하여 따라왔다.

소태산대종사가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요.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창생을 건지는 일인 것이지요."

그녀는 이 엄숙하고 정중한 말에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어떤 위압감과 아울러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은은하게 전달되어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귀의했다.

경성임시출장소에서 소태산대종사가 1개월여 머무는 동안 이동진화·김삼매화·최강동옥·이현공과 최만수화 등이 귀의했다.

소태산대종사는 1개월여 동안 경성 곳곳을 둘러보고 여러 제자들을 얻은 후 5월2일(음 3월29일) 아침, 경성역에서 이리로 출발하여 첫 상경의 일정이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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