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에 이어 네 번째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한 생각을 돌려서 자성을 깨치겠는가?"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다섯번째 질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제시하고 있는 깨침의 핵심이 여기에 달려 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혹은 '반조자심(返照自心)'이 바로 그것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이 그 빛의 방향을 돌이켜 자기의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회광반조이다. 또 자심을 향해 빛을 돌이켜 비추는 것이 반조자심이다. 도대체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법이 필요할 것인가? 만약 방법을 써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다."

위의 보조스님의 말씀은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눈이 바깥 사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보게 하는 놈'을 자각하면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조스님은 '영지(靈知)'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영지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성품을 보는 것이다."

'알려고 하면 알 수 없고, 아는 대상이 아닌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성품이다. 일체의 상대적인 것을 떠나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고 성품이다. 그것은 공적하면서도 영지한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에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의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의 차별이 나타나며" 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공적한 면은 마음의 본체를, 영지한 면은 마음의 작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으로서 '영지'란 삼독심에 물든 중생들의 마음작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성본용(自性本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업과 무명에 의하여 분별의 상(相)을 내어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무념(無念)과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의 마음을 지녀야만 부처다운 마음작용을 할 수 있다.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는 자는 곧 여래이니라(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는 〈금강경〉의 말씀 또한 바로 '자성본용'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중생들의 마음작용은 어떠한가? 그것은 바로 바깥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수연용(隨緣用)'이라 말한다. 중생들이 바깥의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게 되는 이유는 업과 습에 의한 욕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자신의 무명으로 인하여 바깥대상에 마음이 끌려 집착을 하게 되고 그 집착의 결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 자성에 따라 마음이 작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성본용인 것이다. 거울에 비유하여 말하면 '자성본용'이란 바깥 대상을 비치게 하는 성질이며, '수연용'이란 바깥의 대상이 비추어져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충남대·천안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