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질문 또한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에 대한 물음이다. 앞의 대답도 너무 어려우니 근기가 낮은 자를 위하여 다시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마음인데 무슨 방법이 필요한가? 아는 대상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다'라는 보조 스님의 대답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보조 스님은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알고 모르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다. 인식은 아는 인식의 주체와 알아지는 인식의 대상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적 인식으로는 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사라져서 하나로 통일되는 무분별의 지혜로써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도의 세계이다.

'반야(般若)'가 바로 그러한 무분별의 지혜를 말한다.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말했다. 이러한 도의 세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어 보조 스님은 "깨치기를 기다리는 미혹한 생각을 버리고 내 말을 잘 들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깨치기를 기다리는 마음(待悟之心)'이 왜 문제일까? 그것은 깨침(悟)이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언제나 내가 깨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바로 '나의 마음이 그대로 깨친 상태'라는 반조(返照)의 작용을 가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오지심' 자체가 미혹한 마음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는 선사상 속에는 두 가지의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우리의 본래마음과 본래성품은 그대로 완전하며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래성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업과 습기로써 욕망에 이끌려 바깥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망념(妄念)의 실체는 공(空)한 것이며, 티끌과 같은 바깥대상도 공(空)한 것이다. 반야의 지혜로써 그 공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일체의 고통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그래서 보조 스님은 "모든 법이 다 공한 그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의 마음 곧 공적영지심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 마음이 본래면목이며,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서로 은밀히 전한 법인(法印)이 되는 것이다. 이 공적영지심을 '일원상진리'에서는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마음을 깨치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부처의 경지에 올라가고 본래의 자리에 들어 단박에 의심을 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하나가 되어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수 있으며, 대장부로서 일생의 일을 다 마치어 '일이 없는 사람(無事人)'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여기에서 '공적영지심'으로 환원된다. 텅 비고 고요하면서도 신령스럽게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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