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공적영지한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것이 여섯 번째 질문이다. 어렵게 설명하지 말고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내 안에 있는 그 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알려 달라는 도전적인 물음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보조스님은 '그대가 지금 묻고 있는 바로 그 놈!' 그것이 바로 공적영지한 마음이라고 대답한다. 이어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返照) 밖에서 찾고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언어를 떠난 그 마음의 세계를 직접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禪)에서 말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보조스님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한 생각 빛을 돌이키라고 말한다. 미혹한 마음이 하루 종일 바깥 대상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것을 '미심축물(迷心逐物)'이라고 한다. '迷'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쌀을 보고 달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니 어리석기 마련이다. 또 '逐'자는 '●을 축'자로 '돼지(豕)가 무작정 돌진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밖으로 향해 달리던 그 마음의 빛을 내 안으로 돌이켜 비춰야 한다. 그럴 때 공적영지한 마음이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보조스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성내고 기뻐하고,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가지가지 행위와 동작은 필경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주인공인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움직이는 등 이러한 행위를 하게 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철학과 의학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문제는 뇌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뇌과학이 발달해 간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영역을 주관하는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만약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어째서 금방 목숨이 끊어진 사람의 경우 몸은 그대로 있음에도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을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며, 발은 걷지 못하는가?" 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따라서 육신이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로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임시로 모여 있는 것이어서 결국 공(空)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실체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주인공은 본래 마음이며, 그것은 항상 뚜렷이 알아(了了常知)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明明不昧) 모든 것을 느껴서 다 통하게 하며(感而遂通) 온갖 묘한 작용(恒沙妙用)을 일으키는 놈이다.

결국 공적영지한 마음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항상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조는 '평상심이 도'라고 말했던 것이다. 보조스님이 인용하고 있는 "신통과 묘한 작용이여, 물을 긷고 땔나무 나르는 것이다.(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란 말도 마조의 제자인 방온거사의 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다름 아닌 도의 세계이자 불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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