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산제법성지의 과거·현재·미래를 이어주는 원광선원.
제법성지의 현실과 과제

원기9년 4월 소태산은 서중안의 간곡한 하산 요청으로 새 회상의 기반이 될 익산총부 건설을 위해 만 4년간의 변산시대를 정리하고 봉래정사를 떠난다. 제법성지는 그 후 김남천, 이춘풍 일가에 이어 이보국, 전종환이 관리 수호하였으나 후에는 고관진 등 실상사 주민에게 위탁하여 수호하게 된다.

그러다 원기33년에 사산 오창건의 발의로 석두암을 중수하였으나 원기35년 한국전쟁을 겪으며 공비소탕 작전 중 석두암과 실상초당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물론 이 때 실상사도 함께 전소되었다.

그 뒤 제법성지는 약 28년 간 잊혀진 성지로 교단의 손이 미치지 못한 채 풀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시 하섬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공전 교무는 풀 속에 묻혀 찾기조차 어려웠던 성지를 오가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지 수호센터를 물색하던 중, 원기63년 마침내 지금의 원광선원을 매입했다.

원광선원 매입과 더불어 그해 '변산제법성지사업회'가 발족되고, 원기65년, 교강 발표 60주년을 기념하여 봉래정사 석두암 터에 '일원대도비'를 건립, 이듬해 대산종사 임석 아래 봉고식을 거행했다. 원광선원 초대원장으로 이공전 교무가 부임하면서 성지 사업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원기81년에는 강남교당 교도들의 합력으로 봉래정사 부지 4778.4㎡를 1억2천여만 원에 매입하여 성역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소실된 실상사의 발굴 작업과 복원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매입한 부지의 원 소유자인 실상사측에서 땅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교단에서는 불교와의 원만한 관계유지를 위해 제법성지 부지사용과 장엄사업 협조를 얻어내는 조건으로 원기83년 그 땅을 불교 측에(엄밀히 말하면 당시 실상사의 본사인 선운사의 주지 대우에게 양도한 것이 됨) 무상 양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약조 아래 2대 임윤철 원장은 첫 부임한 실상사 주지 지안의 협조로 원기86년 석두암 터 진입로 공사와 조경 사업에 이어 이듬해 봉래정사 기도실을 신축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무상양도 당시 협조를 약속했던 서류들은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고 성지사업은 답보상태인 채 부지확보가 교단의 절실한 과제로 남아있다.

더욱이 이제 그 일에 관여했던 두 스님이 떠나고 실상사에 후임 주지가 부임하여 복원사업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과거 부지 무상양도의 의미는 퇴색하고 성지순례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교단에서는 제법성지의 이러한 현안에 대해 다각도로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현장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제법성지의 봄은 언제쯤 올까?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성지의 옷 벗은 빈 숲이 못내 시리다.
▲ 원광선원 훈련객 숙소인 황토방은 눈 내린 겨울산과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원광선원 그 숨은 이야기

내변산 골짜기 말마동에 자리한 원광선원,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한다. 종종 풍수를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명당이라고 하더니 정말 선(禪)의 집중도가 높고 마음이 바로 편안해지는 곳이다. 변산을 '수행자의 산'이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법성지 수호도량인 '원광선원'은 교단이 인수하기 전부터 원광선원이었다. 원래 월명암의 주지인 정도전 스님이 1972년에 지은 개인 사찰이었으나 1978년(원기63) 당시 하섬 원장이었던 이공전 교무의 주선과 정읍교당의 희사로 부속 임야와 함께 매입하게 된 것이다.

몇년 전 이공전 원로님으로부터 도전 스님의 원광선원 건립과 그 매입과정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이 우리 회상과 약속된 인연 깊은 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월명암 주지였던 도전 스님은 인근 지역주민의 포교를 위해 동네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자 염원하며 천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그 원력에 감응하심인지 문수보살께서 바로 원광선원 터를 점지하여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짓고 '문수암'이라 했다. 그리고 스승이신 지선 스님을 초청하여 모셨다. 그런데 문수암에 들른 지선 스님은 주변의 지형을 둘러보고 암자 이름을 '문수암' 보다는 '원광선원'이 좋겠다 하며 현판까지 써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5년 후 도전 스님이 개인 사정으로 하산하게 되자 이공전 교무를 통해서 암자를 원불교에 매각하게 된 것이다.

'원광선원'. 그 명칭부터가 실로 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그 암자는 지금도 낡은 기와를 이고 원광선원 중앙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암자 처마 밑에는 '굳세고 웅혼한 느낌'의 행서체로 쓴 지선의 현판 '원광선원'이 산 증인처럼 그대로 걸려있다. 그렇게 원광선원은 마치 원불교를 위해 준비된 땅인 것처럼 새 회상과 인연을 맺고 오늘날 제법성지의 지킴이로 묵묵히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해안 시대의 훈련도량

이렇게 30여 년 간 제법성지의 지킴이로 고락을 함께해온 원광선원의 정체성에 대해 가끔 '성지인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곳에 근무하는 입장에서 이 질문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성지의 현황을 생각할 때 원광선원이 있었기에 잊혀 진 성지를 찾고 그나마 지금껏 순례자를 맞이하며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곳을 매입하게 한 대산상사님과 범산 이공전 종사의 혜안에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변산이 어찌 실상동 봉래정사만 성지이겠는가. 소태산은 5년 간 이 골짜기의 아홉 구비 물길을 따라 걸으며 미래를 사유하고, 이곳의 풍경과 바람 속에서 영감을 얻고 새 시대의 법을 짜셨으며 사자후를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변산 골골이 어찌 소태산의 성음이 메아리 치고 발길 머문 성지가 아니겠는가.

봉래정사에서 겨우 2㎞ 남짓 되는 원광선원 말마동 역시 소태산의 가시거리에 있었으니 필시 이곳도 그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원광선원은 매입 후 '하섬분원 봉래수양원'이라 하였으나 원기79년 다시 '변산원광선원'으로 불렀다. 복지기관에서 훈련기관으로 발돋움 한 것이다. 이곳이 법생지(法生地)인 만큼 교법구현의 훈련기관으로 당연한 변화였다.

새만금 프로젝트가 가시화되면서 '변산이 세상에 드러날 때 천불만성이 난다'고 한 소태산의 예언을 다시 주목하게 된다. 변산은 중생제도의 염원이 불꽃처럼 뜨거웠던 청년 소태산의 원력과 포부가 뭉친 곳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된 불후의 성지다. 원광선원은 지금 그 성지의 지킴이이자 이 법으로 장차 천불만성을 발아시키는 훈련도량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아직은 작고 미비하지만 성지에 기대어 성지와 함께 영성 맑은 '깨달음의 집'으로 서해안 시대를 향해 비상하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변산제법성지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 호부터 익산성지에 관한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변산 원광선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