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내용 하나만 들라하면, 개인적으로는 까마귀와 까치의 소리를 통하여 공적영지심을 제자에게 깨닫게 하는 장면을 들곤 한다.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듯이 보조스님이 소리를 통하여 깨달음에 들어가게한 것은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보조스님은 '진리에 들어가는 길(入理)'이 많이 있지만 너로 하여금 일문(一門)을 제시하여 그 깨달음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말한다. 달마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진리에 들어가는 길에는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 있다고 말했다. 즉 깨달음을 통하여 들어가는 길과 실천을 통하여 들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조스님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입이 깨달음을 통하여 들어가는 길이다. 이제 보조스님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한번 지켜보자.

"그대는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가?"
"예.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듣는 성품(汝聞性)을 돌이켜서 들어보아라. 거기에도 정말 많은 소리가 있는가?"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보조스님은 마침 까마귀와 까치가 지저귀고 있어서 그것을 들어보라고 말한다. 귀를 기울이면 바깥의 소리가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시 '그대가 듣는 성품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소리는 귀를 통하여 들어온 것이지 본래 마음자리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소리가 있을 수 없다. 일체의 소리뿐 아니라 모든 분별이 없는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한 것이다. 즉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의 바탕이요 본체이다. 일단 보조스님은 그 지점을 확인하게 한 것이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이 도무지 없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지 않은가?"

"원래 공하지 않아서(元來不空) 밝고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明明不昧)"

다시 보조스님은 "그 성품자리는 공적하기만 한 것이어서 마치 허공과 같지 않은가?"하고 물음을 제기한다. 그렇지 않다. 그곳은 또랑또랑(惺惺)하여 전혀 어둡지 않은 자리이다. 그러기에 제자는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바로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지혜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본래 마음은 공적하면서도 영지한 것이다. 이처럼 보조스님은 제자에게 까마귀와 까치 소리를 계기로 하여 자기 안에 있는 공적영지심을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不空之體)인가?"
"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아라." 참선을 통하여 깊은 삼매에 들어보라. 끝없이 아래로 떨어져 심연의 깊은 바닥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그 고요의 편안함 속에 다가오는 또랑또랑하고 명징한 정신이 우리의 주인공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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