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스님은 공적한 마음의 본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미 모양이 없으면 어디 대소(大小)가 있겠으며, 대소가 없으면 한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계가 없으므로 내외(內外)가 없고, 내외가 없으므로 원근(遠近)도 없으며, 원근이 없으므로 피차(彼此)도 없다. 피차가 없으므로 왕래(往來)도 없고, 왕래가 없으니 생사(生死)도 없다. 생사가 없으므로 고금(古今)도 없고, 고금이 없으니 미오(迷悟)도 없다. 미오가 없으므로 범부와 성인(凡聖)도 없고, 범성이 없으니 오염되고 깨끗함(染淨)이 없다. 염정이 없으므로 시비(是非)도 없고, 시비가 없으니 일체의 모든 이름과 말을 붙일 수 없다."

불교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일컬어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상대적인 세계, 상대적인 관점을 떠난 자리이다. 대소, 내외, 원근, 피차, 왕래, 생사, 고금, 미오, 범성, 염정, 시비 더 나아가 미추, 성속 등을 떠나 있는 자리가 본래 우리 마음의 본체이다. 기독교에서도 하와가 뱀의 꼬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됨으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고통 받는 원인은 집착에서 비롯되었으며, 선(禪)에서는 '분별주착심' 즉 바깥 대상을 분별하고 그 중 하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심병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승찬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려울 것이 없으니 다만 구별하고 택하는 마음(揀擇心)만 버리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일단 분별하는 마음이 작용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고통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유식(唯識)에서는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작용이 제7식인 말라식에서 작용한다고 말한다. 또 〈금강경〉에서도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님을 볼 수 있다면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분별상을 떠나야 여래지견이 열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마음의 본체는 일체의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 있다. 그것이 바로 텅 비고 고요한 '공적(空寂)'이다. 좌선을 통하여 깊은 삼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공적한 마음의 바탕을 경험할 수 있다. 그곳에는 모든 감각기관인 육근과 그 감각의 대상도 발붙일 틈이 없다. 그러기에 일체의 윤회가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유교와 불교의 큰 차이 중의 하나가 '마음의 본체'에 대한 이해 차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시비분별이 떠나 있는 마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면, 시비분별을 제대로 하는 마음을 추구하는 것이 유교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나누는 마음인 시비지심을 맹자는 사단의 하나로 말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것 역시 분별심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란 허무 적멸한 가르침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하여 보조스님은 "모든 법이 텅 비고 고요한 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작용이 있어 어둡지 않아서 무정물과는 다르게 성품 스스로 신비하게 모든 것을 알아 차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지'이다. 그것은 바로 공적한 마음의 바탕에 도달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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