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종환 시인.

올해도 소한 대한 지나며 폭설 퍼부을 것이다
사나흘씩 눈 쏟아져 산짐승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세상으로 낸 길도 다 지워지는 날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 가고 싶다


올해도 청명 곡우 지나면 꽃사태 나고
남쪽에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지천으로 필 것이다
꽃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눌러 앉히곤 꽃출석부 들고나가
뒷뜰에 오종종 핀 봄맞이꽃 주름꽃 꽃다지
출석 부르며 내 집 마당 먼저 꽃교실로 가꾸고 싶다


올해도 폭우 쏟아져 도시가 무릎까지 젖고
천둥과 번개의 번쩍이는 채찍이
인간의 마음과 캄캄해진 하늘을 쩍쩍 갈라놓곤 할 것이다
그때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


올해도 비명소리 아우성소리 골목골목 넘칠 것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외면하지 않아야 할 목소리 있을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 들을 줄 아는 귀와
균형과 중정(中正)의 지혜를 갖게 해 달라 간구하고 싶다


올해도 가을 오면 굴참나무 잎은 지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장의 낙엽처럼 우주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순간순간이 은총이었던 날들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마른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도종환 시인은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시 '고두미 마을에서'를 발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수상, 제8회 신동엽 문학상 수상,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어떤 마을'이, 고등학교 문학, 국어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등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렸다.

시집으로는 〈접시꽃 당신〉 외 다수.
산문집으로는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외 다수.
동화 〈유리바다〉 등.

최근 산문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를 발간, 충북 보은의 산골 황톳집에서 글을 쓰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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