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영지심에 대하여 보조 스님은 계속 말씀을 하셨다. 드디어 일곱 번째의 질문이 등장한다.
"이미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까?"

이 질문은 〈수심결〉의 내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 핵심적인 교리가 바로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1990년 한국불교계를 달구었던 이슈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 논쟁'이었다. 즉 성철스님이 주장한 돈오돈수와 보조스님이 주장한 돈오점수 간에 어떠한 이론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담론으로 떠오른 것이다.

돈오돈수란 간화선 수행법을 통하여 단박에 깨닫게 되면(돈오) 더 이상 닦음이 필요치 않은 구경각(究竟覺)에 이른다는 것이다. 돈오점수란 비록 돈오하였더라도 그 바탕에 입각하여 지속적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돈오점수'에서 돈오란 다시 닦음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구경각이 아니라, 이성적인 작용을 통하여 깨달은 해오(解悟)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왜 보조 스님은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일까? 우선 '돈오점수'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돈오와 점수를 합하여 놓은 말이 아니라, '돈오에 바탕하여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즉 앞서 이야기한 공적영지한 마음을 단밖에 깨달은 후 그에 입각하여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조계 혜능의 말이라기보다 그의 제자인 하택 신회와 규봉 종밀의 설을 보조스님이 계승한 것이다.

아마도 당시 송광사의 정혜결사에 참여하였던 대중들은 혜능의 〈단경〉을 읽고서 돈오견성과 자성삼학(自性三學)의 내용에 친숙해 있었을 것이다.

〈단경〉의 내용 속에는 당시 오조 홍인의 제자들 가운데 상수제자였던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이 등장한다. 즉 거울에 있는 때를 닦고 닦아서 깨끗이 되는 것처럼 마음을 점차적으로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북종 신수의 설이고, 거울에는 애초에 비추는 작용이 있으므로 닦고 말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 남종 혜능의 설이다.

홍인은 혜능의 게송만을 인가하여 자기의 법을 혜능에게 부촉하였다. 그러기에 혜능의 설은 '돈오'이고 신수의 설은 '점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수와 혜능이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신수의 북종에서 주장한 점수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에서 닦음의 대상이 되는 '마음'은 오염된 중생의 마음 즉 '생멸심'이다. 그러나 혜능의 남종에서 주장한 돈오의 깨달음의 대상인 '마음'은 오염되지 않은 부처의 마음 즉 '진여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능은 '돈오견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공적영지한 참 마음을 돈오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오다가, 다시 돈오한 바탕 위에서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충남대·천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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