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계환 교도·어양교당(논설위원)

종교 제도권에서 흘러 나오는 신음 소리 중 하나가 대중의 참여인원 자체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유'와 '행복'을 찾아 길을 헤매는 중생은 많은데, 왜 이런 소리가 나올까?
이것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자 진리를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확인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자가 즐기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낮은 자세로 안내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간의 단조로운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도록 '관광'을 접목시키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될 때 수행자의 저변이 확대될 것이다.

내안의 행복한 수행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선(禪)' 또는 '명상'이라고 한다. 명상하면서 자신과의 대화에서 얻어지는 몇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당신은 지금 자유로운가? 자유롭다면 또는 자유롭지 못하다면 왜 일까? 더 자유로워지고 부자유스러움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자유는 과연 무엇이고 우리는 어떨 때 자유를 느낄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또는 불행하다면 왜 일까?

행복을 유지하고 나아가 상승시키거나 불행을 줄이고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행복은 과연 무엇이고 우리는 어떨 때 행복을 느낄까?
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삶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내가 알고 있는 자유와 행복에 대한 판단은 올바를까?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올바른 나일까? 내가 아는 내가 참인 내가 아니라면 참 나는 누구일까?

내가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면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 사물, 환경 등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우리의 삶을 스스로 판단해 불행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하게 표현해서 정확한 판단에 의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정확한 지식, 이치에 맞는 지식, 이것을 진리라 표현하고 그 진리가 우리 판단력의 근거가 된다면 우리는 지금 주어진 삶과 세상을 정확히 볼 수 있을까?

모든 종교가 말하는 궁극적 진리는 우리를 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까? 그렇다면 궁극적이고 최고의 근본적인 진리는 무엇일까?

순리자연한 자연의 현상을 직관하고, 진리라 하는 궁극의 이법(理法)을 깨친 분들이 누구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였으며, 스스로 각(覺)한 소박한 순수정신들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 후에 그 제자들로 하여금 가르침들을 모아 배우기 쉽게 만든 틀이 오늘날 종교제도가 되었다.

전해지는 진리에 도달하는 각종 방식은 종교에 따라 다르나, 결국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수행하는 자, 곧 진리를 찾는 자가 자신임을 확인하게 될 때 개안(開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려면 삶은 지식이 아니어서,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지혜를 삶에 적용해야 한다.

길을 아는 것과 가는 것은 다르다. 궁극적 진리를 삶의 모든 부분에 대입하며 살아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길을 외롭지만 묵묵히 찾아 걸어가는 것이 '명상'이다.

물질의 풍요속에 잊혀져 가는 수행자의 참 고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보다 열린 공간과 패러다임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길은 바로 '여유로움'에 있고 '관광'에 있다.

대종사님께서 원불교 교법에 분명히 제시한 바와 같이 모든 일체생령이 '생활이 곧 수행'임을 깨닫고, 실제적 체험으로 증험해야 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 정신은 항상 '진행형'이어야 한다.

살아계신 어느 성인께서는 '참나를 찾아 떠날 때, 느린 기차를 타고 차창 밖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쳐다보는 여유를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새해를 맞이하여 가슴속에 새겨두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교단의 많은 훈련원과 교당들도 보다 편안하고 쉴 수 있는 '휴식'의 여백으로 이제는 그려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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