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주는 1896년 서울에서 부친 이유태와 모친 민자연화 사이에서 3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경자인데 후에 경길로 바꾸었고, 법명은 공주(共珠), 법호는 구타원(九陀圓), 필명으론 맑은 강이란 뜻의 청하(淸河)를 즐겨 썼습니다.

6세에 한글을 깨쳐 7세에는 고소설을 읽었고 8세엔 천자문과 소학을 공부하였다니 꽤 똘똘한 어린이였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교육 환경과 인연복도 특별했습니다. 12세에, 조선 여성 최초로 미국유학을 한 하란사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는 행운을 얻었고, 이화학당 초등과와 동덕여학교를 거쳐, 14세에 순종 황제의 후비인 윤황후의 시독(侍讀)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4년간 한문, 일어 등을 수학하는 특혜도 누렸지요. 18세에 궁에서 나오자 경성여자보통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21세에 수료하였습니다.

신구학문을 아우르는 당대 최고 엘리트 여성으로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자 유학을 준비하다가 집안의 반대로 꿈이 꺾이고 맙니다.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현모양처로서 단란한 인생을 사는 듯했으나 불과 27세에 남편과 사별하는 불행에 맞닥뜨립니다.

남편 탈상에 이어 소태산을 만나니 여기서 그녀의 생애는 다시 큰 굴곡을 겪게 되죠. 일본에 유학 후 문학박사가 되어 조선 여성들을 계몽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전 세계 남녀를 위한 도덕박사가 되라는 소태산의 설득에 감복하여 문학 전공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1991년 96세로 열반하기까지 문학 내지 기록에 대한 집념을 거둔 적이 없습니다. 문학자로서는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교단에서 제일이고, 기록자로서는 법설을 비롯하여 기록물을 많이 남기기로 역시 교단에서 제일입니다. 그녀가 10대부터 90대 만년까지 일기를 썼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일이죠. 또 수집가로도 유명하여 1978년(83세)에 소장품 전시회를 열어 사회적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소태산의 여제자 중 제일인자로서, 당대에 드문 학벌과 더불어 사회적, 경제적 배경 역시 단연 돋보이는 처지였습니다. 그녀는 소태산의 법설을 가장 많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소태산으로부터 '법낭'(法囊·법문의 주머니)이란 별칭까지 얻었고, 후일에 경전을 결집할 때 이바지한 공로가 컸습니다. 또한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서 궁핍하던 교단에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구타원은 교단 기관지인 〈월말통신〉27호(1929년 음1월)에 '본회 전무출신의 부인계에 고함'이란 제언을 게재한 이래 〈월보〉 〈회보〉 등으로 이어지며 문학, 비문학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시가만 보더라도, 〈새 회상 시가 모음〉(원불교출판사, 1982)을 예로 들면, 월말통신·월보·회보·금강 등에 발표된 51명 207편의 시가작품 중 무려 5분의 1인 42편이 구타원 1인의 작품이란 통계가 나옵니다.

1976년에 엮은 문집 〈금강산의 주인〉에 구타원의 시가와 문장 등이 수습되어 실렸죠. 2007년에 나온 〈일원상을 모본하라〉에는 시가 68편이 실려 있지만, 이밖에도 더 있고, 논설과 감각감상 등 문장(산문)은 구타원종사법문집 〈인생과 수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워낙 다작인 데다가 발표 기회 역시 적극적으로 누렸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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