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목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조도일이 강서에 가서 만난 방거사의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불여만법위려자 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是甚마)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에 마조는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선종의 견성인가와 관련되는 특성으로 격외의 독특한 화두가 전개되고 있다. 모든 것은 만법과 짝하지 않는가의 반어적 화법에,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다 마시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한 해법은 의외로 육조 혜능의 가르침에서 모색된다. 혜능대사는 〈법보단경〉에서 만법이 자성에서 나오므로 일체 선악의 행동이 마음 작용에 관련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만법(一萬法)은 이 자성과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법이 자성과 함께 하므로, 자성을 여의지 않아야 모든 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선악, 미추, 시비를 불문하고 만법은 이 자성을 떠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마조가 방거사에게 말한 서강의 물이든, 아니면 남중리 소나무든 만법과 하나 되는 자성의 원리를 발견할 때 견성인가를 내려 줄 것이다.

문제는 견성인가를 과거의 선종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소태산의 가르침을 새겨볼 일이다. 백학명의 이청춘 견성인가(〈대종경〉 성리품 18)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 문목이 원불교에 어떻게 유입되었는지 궁금한 일이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는 부안 내소사에 갔다. 그곳에 당도하여 현관에 걸린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를 보고 밝아졌다. 그러나 '불여만법위려자 시심마'라는 화두에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았지만 가을에 나락이 누른 것을 보고 최후로 깨쳤다고 전해진다.

이에 소태산은 본 화두를 매우 중요시하여 문목 137항목의 하나로 다루었다. 초기교서 〈수양연구요론〉이 원기12년(1927)에 발행되었는데 이의 속표지에는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이라는 권두표어를 걸었고, 판권에는 인지 대신 불여만법(不與萬法)이라 하였다. 초기교단의 최초교서에 본 문목을 채택한 소태산의 심회를 새겨보아야 한다.

본 문목은 〈교고총간〉 6권에 실려 있기도 하며, 옛 교당에서는 건축시 현관에 이 화두를 적어 놓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정전〉 의두요목 6조로 정착되어 심도있게 의두 연마의 항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만법과 더불어 짝한 소식은 내가 시방일가요 사생일신임을 밝혀주는 것으로 원불교의 마음공부로 귀결된다. 만법과 더불어 짝했으니 통만법 명일심의 적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일만법, 아니 나의 오장육부가 만법과 더불어 짝한 소식을 고민해보는 성리연마는 깨달음의 첩경인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