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법인 예비정무 / 김제교당
숙명처럼 찾아온 교당에서의 생활이 운명으로 다가왔다. 정토로서의 21년 중 만13년을 교무님과 두 아이와 함께 교당에서 지내왔다.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교당생활 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많은 나날들을 보냈다. 교단적으로 출가교무와 가족이 함께 생활하며 교화하도록 인정해 주는 정무제도의 마련은 나에게 희소식이자 또 다른 책임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처음 시작된 교당생활은 전북교구 금구교당이었다.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두 아이와 이봉련 교무님을 모시고 다섯 명이 한 가족이 되어 은혜롭게 4년을 지내게 됐다. 하지만 이도 잠시 이 교무님의 인사이동은 나로 하여금 정무 아닌 정무의 생활을 해야만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정갈한 교무님의 빈자리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나에게는 많은 경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중과 함께 하는 공중 살림은 더욱 무거운 부담이 됐다. 또한 대중의 눈과 마음을 살피며 행동해야 하는 일거일동은 오직 정성과 수행으로 일관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린이집 운영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기에 나의 교당 생활은 하루 해가 모자라는 나날들이 됐다. 교무님 또한 오직 교화일념으로 인근 초·중학교 축구부 및 풍물반 운영과 지역민과 함께한 풍물단 운영 및 지역사회 갖가지 활동 참여 등으로 사소한 것 까지는 챙길 여력이 없어 교당살림 또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초·중학생이 된 두 아이들의 친구들로 구성된 어린이·학생 법회가 꾸려졌고, 그들의 부모들이 교당과의 인연이 되어 교도로서의 알뜰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화했다. 두 아이가 이렇듯 교화에 큰 힘이 되어 주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이 어려서 교당생활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나의 편견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던 금구교당의 9년 생활을 마치고 다시 김제교당에서의 생활이 시작 된지도 5년째가 됐다. 그동안의 다양한 경험으로 적응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성스러운 교당에 어떻게 가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하는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교화협의회를 통해 교당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당 비전을 수립 하던 중에 '결혼한 남자교무님이 교당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모범 교당이 되자'는 계획을 말씀하시는 교도님의 의견을 듣게 되었을 때는 그간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까지도 모두가 감사했다. 교무님께서 교도님들의 상담, 순교, 문병 이외에도 각종의식 행사 등을 주관해야 하기에 보이지 않는 많은 도우미 역할이 필요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30·40대의 생기 있는 노련함이 있었기에 많은 아이들의 먹을거리 즐길거리들을 제공하며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어느덧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니, 일반교도를 대하는 것이 아이들이나 학생들보다 많아지게 됐다.

정무를 지원함에 있어 오히려 30·40대의 열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젊은 정무들의 지원을 염원해 본다. 이런 젊은 정무들이 어린이, 학생들의 교화 활성화에 매진할 때 교단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원래 드러나는 일, 앞장서는 일보다 묵묵히 지켜주며 보살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동안 경험해 왔다. 무엇보다 기쁨으로 알고 살아왔기에 제도화되는 정무라는 직책도 중요하지만 교당에서 조금이나마 교무님의 숨통이 되고자 했고 공사에 필요한 부분을 합력하고자 했다.

앞으로 교당 교화활성화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교무님의 교화활동에 사소한 불편이 없도록 교화보조자로서 정진해가고자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