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밀밭 사이로 사뿐 사뿐 오시는 봄

▲ 사뿐 사뿐 밟아보는 밀밭, 마음 밭에도 그렇게 사뿐히 봄이 오시리라.
새싹이 자라고 있는 우리 밀밭, 초록빛이 한창인 전남 구례로 향했다. 어떤 이는 '밟으면 밟을수록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고 표현했던가. 겨우내 동토 속에 떠 있는 어린 밀 뿌리를 살짝살짝 눌러주면 사방에서 환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기분 좋은 상상은 취재 길, '초록빛' 생기를 불어 넣는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들어서자 트럭 한 대가 멈춰섰다. 동행을 해줄 홍진주(24)씨, 고추밭에서 작업 중에 달려왔다고 했다. 몸보다 마음이 앞서 달려왔을 진주 씨의 콧등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다. 이때만 해도 그녀가 지리산자락에서 환원순환농법으로 유명한 '농부 홍순영'의 딸이라는 것을 몰랐다.

밀을 심어 놓은 120마지기(79,200㎡) 밭에 초록빛 싹이 올라앉았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밀밭 밟기'를 행해왔다. 겨울 동안 밀밭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서릿발로 인해 들뜬 밀 뿌리를 땅에 밀착시키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밀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고 웃자람을 방지한다. 밀의 생육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민 싹들을 진주 씨와 함께 밟았다.

스무 살 꽃다운 처녀가 농사를 짓는다니 좀 놀랍다는 말을 건네자 호탕한 웃음을 보인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거칠 것 없는 호탕함이 배어있었다. 도시의 젊은이들과는 사뭇 다른 당당하고 진중한 그녀의 행복이 읽혀졌다.

"올해는 겨울동안 이상기후로 웃자란 밀밭이 많을 거예요." 게다가 2월 극심한 한파는 밀밭 주인들의 가슴 또한 꽁꽁 얼게 했을 터. 고된 농사꾼의 가슴앓이를 알고 있을 진주 씨는 '로컬푸드'의 가치를 이야기 했다.

"국산 밀은 친환경으로 재배해요. 안전할 뿐 아니라 탄소마일리지를 절약할 수 있어요. 또 신선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크잖아요." 진주 씨는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탄소 에너지의 순환적 기능으로 건강에 유익하다는 '로컬푸드 운동'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도시 총각에게 시집가고 싶단다. 예기치 못한 선전포고다. 예상컨대, 그녀만큼 다부진 농촌 총각이 없는 탓이리라. 사뿐 사뿐 밟아보는 밀밭, 마음 밭에도 그렇게 사뿐히 봄이 오시리라.
▲ 순영농장의 고추밭은 정리작업이 한창이다.
밀밭을 나와 진주 씨가 작업 중 달려왔다는 '순영농장' 고추밭으로 향했다. '순영 농장'은 땅과 사람의 치유를 위한 농장이다. '농부 홍순영'이 환원순환농법으로 4만평이 넘는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이다. '순영 농장'의 넷째 딸, 진주 씨를 이곳에 도착해서야 알아봤다.

'농부 홍순영'은 빈손으로 시작해 나이 열아홉에 땅을 처음 구입했다. 마흔 될 때까지 서른마지기(19,800㎡)를 장만하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 '순영농장'은 쌀농사 112,200㎡, 감농사 26,400㎡, 매실농장 4,950㎡에 고추 등 계절 농사도 시기에 따라 재배하고 있다.

고추밭은 정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땅속 비닐을 거둬내고 고추나무 고정대를 뽑는 일에 마을 분들이 힘을 보탰다.

땀도 식히고 목도 축일 겸 잠깐 일손을 멈춘 오후 새참시간, 진주 씨가 내온 단감은 입안 가득 아삭아삭 시원했다. 단물 가득한 감으로 물 대신 목을 축이는 마을 분들의 표정은 '구례 단감이 최고다'는 말을 대변한다.

'순영농장'에서 제일 중요한 시설은 친환경 제재를 만드는 공간이라고 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잡초를 채취합니다. 채취한 풀들을 절삭해서 탄화기에 넣고 그 액을 추출하지요" '순영농장'의 안 주인 서순자 씨는 이렇게 만들어진 '순환 제재'를 농작물에 뿌린다고 일러준다. 지천으로 널린 풀들이 농사의 보물인 것이다.

'순영농장'은 직접 퇴비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미강(쌀겨) 60%, 축분(소똥) 30%, 깻묵 3%, 돼지뼈 6%, 등을 혼합해서 만든다. 미강은 미생물을 가지고 있고 자기 양분을 자기가 생산한다고 한다. 질소함량도 높다. 축분은 질소와 발효율이 높다. 깻묵은 영양제, 돼지뼈는 칼슘과 인을 보강한다. '순영 농장'의 쌀농사에는 이것에 우렁이가 더해진다.
"여기서 짓는 농사는 땅에 해로울 일이 하나도 없어. 땅에서 난 것들을 땅으로 되돌려 주는 농사짓기 잉게" 고추밭에서 일손을 보태고 있는 어르신의 소박하고 더할 나위 없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땅이 쓰러지면 사람도 쓰러진다. 사람이 먹는 것이 안전하면 땅 역시 평안해진다. 결국 땅과 물과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행복해지는 농사짓기, 그것이 바로 환원순환농법임을 이곳 '순영 농장'에서 깨닫는다.

'순영농장' 고추밭을 나와 다시 밀밭을 걸었다. 이곳 밀밭 가까운 곳에 우리밀 가공공장이 있다. 1992년 설립한 최초의 우리밀 가공공장이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제분 공장은 많이 있지만 대부분 수입밀을 가공하거나 수입밀과 우리밀을 병행 가공한다. 최초의 우리밀 전용 가공공장, 우리밀 구례공장은 단순한 제분공장 이상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이 공장에는 마을 주민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밀 생산으로 지역농민의 소득을 높이고 이뿐만 아니라 이익의 일부를 생산자에게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생산 장려금을 밀생산 농민들에게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먹거리는 농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햇빛과 바람과 땅 속에서 서식하는 수많은 미생물 등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생산되어 진다. 우리의 먹거리는 그렇게 공동체의 산물인 것이다. 초록 새싹이 움트는 밀밭에서 담아두었던 생각이 여문다.

"밀이 익으면 나락마냥 누런 게 아니라 붉으스름한데…이삭 베어다가 불피워놓고 그슬려…그럼 찌지직 소리가 나면서 그슬려진께… 양손으로 팍팍 비벼서 입김으로 훅~~불면…그것이 까불른다고 하는 것여… 밀껍질은 날아가고 알맹이만 남제… 입안으로 털어 넣고 씹으면 구수하면서도 쫀득한 게 그리 달아… 한참 먹다보면 주둥이는 시커먼 해지고… 집에 올 때 덜 익은 밀줄기 꺾어서 피리 만들어 불고오구…" 밀밭 사잇길, 마을 어르신들의 밀서리 이야기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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