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전의 음을 찾아야 합니다"
동편제 집안, 40년 가야금 인생

▲ 40년 동안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가야금.
남원 향교동에 위치한 제성 가야금 산조청. 간간히 내리는 비를 피해 현관문을 지나 연습실에 들어서자 고태나는 12현 가야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나 한 세월을 함께 했으면 저러나 싶다. 송화자(법명 혜자·55) 교도가 넌지시 다가와 가야금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했다.

"40년 동안 저와 함께한 가야금입니다. 그동안 음색 관계로 현을 잇는 부들과 부들을 받쳐주는 안족(雁足)을 수시로 갈았습니다. 그래도 오동나무만 좋으면 평생 쓸 수 있습니다."

그가 가야금을 접했던 계기는 모친 박정례 명창의 영향이 컸다. 그의 외가 역시 남원·운봉·구례·순창·흥덕에서 불리어진 동편제 판소리 집안이었다. 그의 모친은 송만갑 명창의 수제자인 판소리 대가 박봉래 명창의 무남독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판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가야금을 배웠지요. 가야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머니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요 병창과 가야금풍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등학교는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어 추계예술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인 막내 할아버지(박봉술 명창) 집에서 소리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는 순천에서 학원을 했던 모친을 도와 학생들을 지도했다. 대학 때는 후배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주는 한편 장단을 쳐 주기도 했다. 한양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남원시립국악원 교수부로 학생들의 가야금을 지도했다. 이후에도 대학출강과 개인지도를 계속했다.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남원시립국악원,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서울국립국악원, 전북도립국악원 등지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 국악원에서 수석 또는 부수석급으로 근무하고 있어 보람됩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늘 손가락 기능보다 성음(成音)으로 득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어떤 음악과 함께 해도 튀지 않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현재 역할을 볼 때 국·내외에서 다양한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진정어린 충고를 잘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음악은 성음을 체득하여 내는 음이지 기계적인 음으로 할 수 없는 음입니다. 성음을 얻으려면 이면에 숨어 있는 음 이전의 음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체득하려면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 서로 교류되어야 듣고 얻게 됩니다. 그 음으로 연주를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겸손한 마음이 생기고 스승과 제자 사이는 물론 다른 사람과도 불협화음이 없습니다."

그는 시나위와 살풀이 음악의 예를 들었다. 악보가 정해진 것이 없어도 음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성음으로 득음된 사람은 어떤 공연을 해도 협화음을 낸다는 내용이다.

"우리 음악을 서양음악에 맞춰서 작곡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퓨전에서 진실한 음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맑고 깨끗하면서도 좋은 소리를 내는 우리 음악을 찾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깊이 있는 농현을 구사하며 다양한 조와 선율로 인간의 감정을 표출 하고 있는 김병호 류 가야금 산조와 전통 가야금 가락의 진수를 보여주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들어 볼 것을 권했다.

"가야금 산조에서 일가를 이룬 유파들입니다. 김병호류는 농현이 깊고 남성적이라면 김죽파류는 여성 음악으로 나왔지만 깊은 성음이 있고 곰삭은 맛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는 공연 실황을 담은 CD 두 장을 건네 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차 안에서 공연을 들어보니 감동이 절로 일어났다. 감동을 주는 음 이전의 음이 이런 것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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