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황이천 순사.
▲ 일제가 탄압하던 원기25년경 대각전에서 본 총부 전경.
순사 황가봉(黃假鳳)은 완주 사람으로 이리경찰서, 이리역전파출소, 황등주재소를 거쳐 원기21년 10월 총부 청하원에 신설된 북일주재소에 파견됐다.

황 순사는 어느 날 총부에 사는 박수권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물어 보기도 하고 '배우는 책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 박수권은 다음 날 〈보경육대요령〉 한 권을 가져다 주었다. 황 순사는 읽어보고 별스럽게 배울 것이 없는 책이라 생각되어 "이외에 다른 책이 있으면 가져 오라"고 했다.

박수권은 〈조선불교혁신론〉, 〈수양연구요론〉 등을 가져다 주었다. 황 순사는 역시 자상히 살펴보아도 배울 것이 없는 책이라고 단정하고 박수권에게 말했다.

"그래 멀쩡한 사람들이 할 일이 그리 없어 이러한 책을 배운다고 쪼그리고 앉아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전부 미친 사람들만 모여 있구만. 자네도 틀림없이 미친 사람이야."

황 순사가 처음 총부에 주재하여 회원들을 철두철미하게 감시하자 제자들이 모두 그를 악질 순사라고 미워했다. 그러나 소태산대종사는 처음 올 때부터 미워하지 않고 다습게 대했다.

일본 경찰이 불법연구회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내사를 하게 된 것은 원기22년 백백교(白白敎)사건 이후 부터였다. 백백교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이유로 조선의 신흥종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킬 방침을 정했다.

이리경찰서 서장이 황 순사를 호출했다. 황 순사가 이리경찰서로 들어가니 서장과 고등주임이 앉아 있다가 서장이 먼저 말했다.

"당신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조선의 유사종교 단체는 표면은 감언이설로 가장하고 있으나 대개가 민족주의자들의 결합이다. 이 점을 잘 인식하고 또 시국의 장래가 내선일체가 필요 불가결의 요건이니 이러한 의미에서 그대를 도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전문사찰원으로 내정하니 불법연구회를 철저히 내사하여 해산시킬 수 있는 요점을 찾기를 바란다."

"잘 알았습니다."
고등주임이 말했다.

"이상의 사유를 철저히 내사하여 발굴할 때는 자산은 전부 정부에서 압수하여 경매 처분할 것이므로 그때에는 그 자산이 그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처리하여 줄 것을 약속한다. 또 관등도 승진되도록 약속한다."

서장은 "내일부터 비밀경찰로서 행동하되 경찰복도 입지 말고 불법연구회 회원과 동일한 행동을 하라"고 했다. 황 순사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소태산대종사를 찾아가 "앞으로 자신도 이제는 순사가 아닌 회원이 되어 회원과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겠다"고 말하자, 소태산대종사는 학복을 내주었다.

소태산대종사가 황 순사를 챙기고 보살피기를 사랑하는 제자와 조금도 다름없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양 한결같이 챙기고 사랑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이해할 수 없어 여쭈었다.

"황 순사를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겠나이까?"

소태산대종사가 말했다.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 그 사람도 그대들과 같은 사람이거늘 감화시켜 제도를 받게 하여 안 될 것이 무엇이겠느냐!"

원기22년 하선 결제식부터 황 순사는 머리를 깎고 학복을 입고 선방에 들어가 앉아 일반 선객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결제식 법문시간에 소태산대종사가 황 순사에게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선방에서 황이천은 〈육대요령〉의 사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참으로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것은 헛것이었고 진실로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각성했다. 그 후 소태산대종사는 조금씩 황이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소태산대종사와 황이천 사이에는 신의가 맺어졌다. 소태산대종사는 종전처럼 그를 '황 순사님'이라고 깍듯이 부르지 않게 되고, 다정한 제자로서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황이천은 집안 어른을 모시듯 겸허한 자세가 되어 그 후로 불법연구회와 소태산대종사께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황이천은 원기25년 4월, 북일주재소에서 황화면(현 여산면)주재소로 전임됐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본서로 발령, 이리경찰서 고등형사로 임명되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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