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생령 깨우치는 개벽대종

▲ 과거 종각은 현재 종각의 길 맞은편 위쪽 자리에 있었으며 우측의 콘크리트 기둥이 대각전 입구로 대각전 오르막길의 우측인 법은관 건물 방향에 있었다.

3월이 지나 4월이 왔다. 음력으로 윤3월이 들어있어 조석으로 쌀쌀한 날씨지만 조금씩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 기운에 덩달아 총부 수목들의 가지마다 푸른 싹이 오르고 있다. 푸르름이 솟아나는 봄 속에 여전히 추운 바람을 보면서 〈대종경〉 전망품 2장 내용을 생각하게 한다. '풍우상설과거후(風雨霜雪過去後) 일시화발만세춘(一時花發萬歲春)'이라는 구절이다. 풍우(風雨)와 상설(霜雪)을 다 지낸 후에 일시에 꽃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아직은 춥지만 곧 봄이 오면 모든 꽃들이 만발하듯이 지금 세상도 혼란하고 욕심의 바다에서 고해의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머지않아 도덕세계를 이루어 모두가 다 같이 낙원의 세상에서 살게 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벽대종이 있기까지

새 봄이 오는 4월은 교단적으로는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을 기뻐하며 새 회상이 열린 날로 우리 전교도의 공동생일을 기념하는 달이다.

더불어 국가적으로는 나라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국회의원 총선거를 11일에 실시한다. 교단은 개교 100년을 맞이하면서 나날이 교운이 융성하기를 기대하고 국가적으로는 새로 선출되는 국가의 일꾼들이 앞으로 우리나라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국가를 운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월을 맞이해 본다.

익산성지를 들어서서 왼편의 오르막길을 오르자면 종각이 있다. 종각 위쪽으로 대각전이 있다. 종각의 이름은 원음각(圓音覺), 종의 이름은 개벽대종이며 좌산상사가 종법사 재임시절 붙인 이름이다.

총부에 종각이 처음 조성됐던 시기는 원기32년 2월에 당시 부산 초량교당 김정윤 교도(현 서면교당) 이모(故 오공순님)의 열반기념으로 교당에 희사한 종을 공타원 조전권 종사가 총부로 보낸 것이다.

부산에서 철도편으로 총부로 옮겨 온 것이다. 당시에는 총부에 종각이 없어서 세탁부 좌측 처마 밑에 장나무 다리를 대로 달아 사용했다.

이후 원기39년 한국전쟁 직후 김정윤 교도의 희사로 이리시 중앙초등학교 옆에 있던 사찰(동본원사에 소속된 절)의 종각을 총부(대각전 올라가는 길 기둥 옆)로 이전 건립하였으며, 세탁부 옆의 종을 종각으로 옮겨 사용했다.

원기66년 5월에 사용하던 범종이 깨져 사용이 어렵게 되자 남원교당이 시내로 이사하면서 교당의 범종을 총부로 옮겨와 사용했다.

그러던 중 그 동안 사용했던 종각은 노후 되고 종은 왜소하여 중앙총부에 걸맞은 양식의 종각과 종이 새로 마련돼야 한다는 대중의 염원에 따라 현 위치에 종각이 새로 조성됐다.

후일 서울에서 총부를 찾은 한 방문객이 "개벽대종은 한국의 전통을 그대로 살린 종이다. 귀한 종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며 "우리의 전통 그대로 재현한 참 아름다운 종"이라 하며 감탄했다.

▲ 현재의 종각은 대각전 위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원음방송 및 신문사가 있는 원불교 문화회관 건물이다.
종각에 얽힌 에피소드

새벽 5시와 밤 10시 총부 인근은 언제나 고요하고 은은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종소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종소리에 반해 종소리를 녹음하고 싶다고 미리부터 찾아와서 촬영해 가는 외국인도 있었다.

어느 땐가는 밤 10시에 종을 치고 내려오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종치는 모습 보고 싶어 왔노라고 한번만 더 쳐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을 치면서 겪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필자에게도 약 10여 년전 고등학교 3학년 때 전무출신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이 종에 얽힌 기억이 있다.

당시 상주선원에서 고3 친구들이 모두 모였고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들 반가움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몇몇 친구들과 나가 놀기로 했다.

즐겁게 놀던 우리들은 일부는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내가 다닐 곳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기에 원광대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걸음도 빠르고 그 당시 평소에 많이 걷기도 하였던 터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원광대를 들어서서 총부가 있는 쪽을 가려하니 함께 걷기로 한 친구들 중에서는 아무도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총부 쪽 문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종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면서 길을 찾게 되었다. 지금도 총부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땐 그랬지 하는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출가를 앞둔 간사들은 새벽 5시 33타를 쳐야하는 고행의 기간을 지내기도 한다. 한 간사는 종을 치기위해 20분 전인 4시40분에 시계를 맞추고 잤다.

그런데 너무 곤히 잔 나머지 늦잠을 잔 것으로 착각해 3시에 종을 친 적도 있었다. 시계를 잘못 보고 벌어지는 일도 가끔 발생한다.

33타와 28타

그러면 과연 종을 몇 번치는가? 총부에 근무하는 남자 교역자는 숙직을 서면서 아침, 저녁에 종을 치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다보면 행여 숫자를 틀릴까 걱정하기도 한다.

행여 너무 빠르게 아니면 너무 늦게 종을 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종을 치다 시계를 보기도 하였고 숫자 세다 기억이 안 나서 당황하기도 했다.

종은 새벽에는 33번을 저녁에는 28번을 치게 되는데 서른세 번을 치는 이유는 본래 33이라는 숫자가 불교와 아주 친숙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33종의 관음으로 나눈 것이 삼십삼관음,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몸을 화현하는 가운데 33신으로 크게 나눈 것이 삼십삼신이다.

그리고 속세 6천의 제 2천인 도리천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삼십삼천(三十三天)이라 한다. 이 삼십삼천은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하는데, 한 가운데 제석천이 살고 있고, 사방에 각각 8개씩의 성이 있어서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새벽마다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서른 세 번의 종을 치는 것은 새벽마다 삼십삼천의 속세 세상을 열고 나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사람들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저녁에 28번의 종을 치는 이유는 바로 해와 달이 운행하는 것을 우리 눈에 보이는 별무리를 근거로 하여 하늘의 별 자리를 나눈 것이 바로 이십 팔인데, 그 하나하나에 수를 붙여서 이십 팔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십 팔이라는 숫자는 불교와도 관련이 많은 숫자이다. 본래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는 모든 존재의 세계를 총칭하는 말인데, 욕계에 육천, 색계에 십팔천, 무색계에 사천이 있다고 한다. 이를 모두 합하면 이십 팔천이 된다.


아침에는 삼십삼천의 욕계를 열고 깨어나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이제는 밤이 되어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세계를 닫고 잠에 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 중생이 새벽의 종소리에 맞추어 잠에서 깨어나듯 일원의 진리로 중생의 껍질을 깨고 부처의 본성을 발현하고 저녁의 종소리에 맞추어 잠을 이루듯 모든 번뇌와 무명을 벗고 해탈하여 자유자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봄의 소식, 대각의 소식이 들리는 4월을 맞이해 본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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