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 조대진 대호법
경제적 성공에 이어 교법봉대

관산 조대진 대호법은 23세에 '갑신상회'라는 주방기물 상점을 차려 '신용이 반 자본'이라는 신념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 몇 년간 대상포진의 일종으로 힘들어 할 때 친척의 권유로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던 도중 〈원불교 전서〉가 찬란한 광명으로 다가오자 그 자리에서 관산 대호법은 교전을 속독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후 관산 대호법은 수원교당을 찾아 원불교 교도가 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관산 대호법은 그동안 정신적 삶의 원동력을 갈망하며 의지할 종교를 찾고 있었다. 관산 대호법은 원기62년에 입교한 후 중앙총부와 영산성지 등을 순례하며 대종사님과의 숙겁의 인연임을 통감하게 된다. 속깊은 마음공부가 필요함을 느낀 관산 대호법은 총부에 머물면서 동산선원 청강생으로 참여하며 적공에 힘을 썼다. 원기68년 신도안이 정부정책으로 이전을 하게 되자, 대산종사가 '대전 근교에 삼동원 후보지를 물색해 보라'는 부촉을 받고 현재의 천호산 삼동원 부지를 재단법인으로 이전 등기하는 등 삼동원 이설사업 추진위원장의 역할을 다했다.

또한 관산 대호법은 총부를 내왕하면서 정문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원기69년 정문신축을 발원해 성사시켰고, 대종사 성탑 주변장엄불사도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원기63년부터 수원교당 제2대 교도회장에 선출돼 25년간 봉직했다. 그동안 수원교당 신축불사와 오산 연원교당 설립, 서울회관 건립 후원, 용인 둥지골 청소년수련원 건립불사에 정재를 희사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공도의 주인이었다.

경산종법사는 "일원대도에 귀의한 후 법회참석과 〈교전〉 탐독은 물론 성지순례와 동산선원의 수업을 청강하는 등 남다른 공부심과 열정으로 교법의 이해를 넓혔다"며 "회상 창립의 역사관으로 공도헌신의 의지를 불태우며 마침내 제생의세의 공도자로 우뚝 솟아 대호법을 이뤘다"고 칭송했다.

삼동원 원장인 김혜봉 교무는 "일관된 신성으로 사명감을 고취하며 사셨고, 대산종사의 지도를 받아 출가의 심법으로 좌산상사를 보필하며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 헌신봉공했다"고 추모했다. 재가교도 대표로 나선 전덕선 교도는 "큰 운수회사를 경영 중에도 상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에 나와 삽질과 건축자재 운반을 하며 교도회장으로서 혈심혈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부인 학타원 남대신화 교도와 장남 조백호 수원여객 사장을 비롯해 지호, 경숙, 유호, 은호, 신호의 2남 4녀의 자녀와 손자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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