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님 법 만난 것은 큰 행복이지요"
오직 한마음으로, 변치 않는 신심
교당 말없이 챙기는 숨은 공도자

서곡교당을 향하는 길, 목련꽃이 수줍은 듯 봉오리를 머금고 있었다. 서곡지구 도심지에 아담하게 자리한 교당에서 유향선(81) 교도와의 조촐한 찻자리가 마련됐다. 목련꽃에 한 자리 빼앗긴 마음을 담백한 차 향으로 먼저 달랬다.

"교무님 뜻을 철저히 받드시는 분이셔요. 교무님이 하는 행동이나 말은 무조건 믿고 따르셔요. 그야말로 정사의 모범이시지요." 서곡교당 이심안 교무가 유 교도의 강직한 신심을 대변했다. 과묵한 실천으로 교당의 아쉬운 곳을 말없이 챙기는 공도자이자 교당의 큰 어른임을 전해 받았다. 시비이해를 분명히 따지는 밝은 시대, 희사만행의 표본인 유 교도는 주위 인연들의 포근한 의지처인 것이다.

그가 결혼해 원불교에 입교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별한 남편 정용진 교도는 진안교당 초창기 부회장을 역임했다. 남편의 종교 선택은 신중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여타 종교를 두루 섭렵한 남편은 '그중 원불교가 제일 낫더라'며 주저 없이 먼저 입교했다. 이후 부부는 매일같이 새벽좌선을 함께 하며 서로에게 든든한 도반이 됐다.

그는 5남 1녀를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생의 고비마다 일심으로 좌선과 기도에 정성을 들였다. 말없는 수행 정진, 이는 그의 50여 년 신앙생활 동안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어머님이 늘 기도를 하고 계셨어요. 제 어린 기억에는 어머님 기도 모습이 생생하지요" 함께 자리한 셋째 아들 정종현(서곡교당 교도회장) 교도는 어릴 적 기억의 모친을 회상했다. 정 교도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모친의 고생담도 전했다.

"형제들이 자랄 때에는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장사로 생계를 꾸리시면서 갖은 고생을 하셨지요. 그때 너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뵈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극히 어려웠던 세월 속에서도 자녀들을 교당으로 이끌며, 가정에서도 교법실천의 모범을 보여주며 감화시키는 등 가족교화에도 정성을 다했던 모친이다.

유 교도는 서곡교당 창립 공덕주이기도 하다. "어느 날부터 조석심고를 하면서 서곡지구에도 교당을 하나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중 아들이 마침 부지를 사서 건물을 짓게 됐지요. 내 마음으로 여기에 교당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제 뜻을 잘 받아 준 아들 내외가 고마워요." 서곡지구에 교당을 세우고 싶다는 그의 간곡한 서원은 원기88년 전주교당 김경수 교무의 출장 법회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그의 아들이 치과 건물 한 층을 무상임대로 희사해 148.5㎡의 법당과 생활관을 마련하면서 교화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이에 기반해 그는 교도들과 함께 교당 신축을 위한 천일기도 등 정성을 들이면서 교화 활성화에 매진했다. 서부 신시가지에 마련된 교구청 부지의 이전 신축계획 변경 등 여러 난관들이 있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모든 것이 순리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교법에 대한 변함없는 신성과 기도일념으로 정진심을 놓지 않았다.

그는 원불교100년을 향한 비전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교화협의회를 여러 차례 진행하는 교무와 교도들을 일심으로 지원하며 교당의 대 소사에 소리 없이 합력했다. 그의 신심은 또 한번의 공심과 적공을 발휘하게 했다.

원기97년 그의 아들 내외가 같은 건물 내 교당 옆 148.5㎡ 상가를 또 다시 무상임대하기로 결정해 서곡교당은 대법당과 소법당, 청소년실, 주방 까지 총 297㎡를 새롭게 가꾸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곡지구에 대종사의 심법을 전달하는 확고한 교화의 장을 마련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제가 인연복이 많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도 위로 오빠들이 저를 공부시켰어요. 또 남편하고 결혼해 대종사님 법을 만난 것도 저의 큰 행복이지요" 그는 자신의 혜복을 묵묵한 자신 수행으로 보답했고, 공도자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단련시켰다. 그에게는 교무의 행동과 말, 그대로가 곧 '교법'이었고 '말씀'이었다. 그런 그의 합력의 은혜는 교당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대공덕주로 자리했다.

그는 얼마전 까지 교전을 사경했다. 두 번의 〈전서〉 사경을 마쳤고, 대종경 사경은 열 번이 넘는다. 그의 사경노트에는 굵고 반듯한 그만의 서체로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오롯하게 새겨진 법문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인터뷰 내내 말을 아끼는 그의 모습은 깊은 신성의 또 다른 면모였다. 오직 한마음으로 변치 않는 신심과 하심의 정신을 실행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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