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의 동기와 우리의 서원
고해 헤매는 사람들
낙원으로 인도하는
실력 갖춘 안내자 되자

▲ 장오성 교무
경기인천교구 송도교당
칠흑같은 어둠 속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코앞까지 시퍼런 물이 출렁이는데 도와줄이 아무도 없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한 후 아우성치다가 곧 절망하며 죽어가던 사람들의 표정, 남들은 다 웃고 다니는데 나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어떤 경험, 바로 파란고해의 단면이다. 인간은 몸을 받는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된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대 인류는 물질문명의 독주라는 고해를 그것에 더하여 경험하고 있다.

왜 우울하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가.

과학문명은 급속히 발달해가는데 우리 인간의 정신력은, 의식의 힘은 아득히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과학 기술이 주인이 되고 사람들은 그것의 부림을 받고 있다. 이미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쥐어주었고, 운전실력 없는 사람이 브레이크 장치가 없는 차의 가속페달을 놓지 못하고 계속 밟고 있는 위험천만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은 속성상 편리를 추구하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이미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현실이자 미래이다. 문명이기의 편리함은 이미 그 맛을 본 사람이라면 떨쳐버리기 힘든 마력의 유혹이다. 자동차, 전화, 의료기술, 컴퓨터,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들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이미 견딜 수가 없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10년 후쯤이면 생각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첨단 기술의 발달은 이제 사람이 죽지않고 영생을 살 수 있게도 만들고 있다. '나'의 뇌를 저장하여 인공지능 로봇에 장착시키면 '나'라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단다. 로봇이 고장나면 저장해 둔 '나의 뇌'를 새 로봇에 계속 옮기기만 하면 된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일분도 조용히 사색하거나 성찰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말도 익히기 전부터 사용한 우리 어린이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기계에 중독된 현대인들에게 인내, 절제, 기다림, 성찰과 같은 품성은 길러질 틈이 없어 보인다. 각종 범죄와 폭력, 다툼,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들이 줄을 잇는 이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미 자살대국, OECD 국가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는 최하위, 특히 어린이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찌 중 단연 최고 수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불행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종사님께서 이 세상에, 특히 한국 땅에 오신 이유이다. 성자들은 때에 맞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받아 세상에 오신다.

아무리 긴 세월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구원의 방편을 일러주신다고 해도 성자들은 그 당시 시대상황과 인지 정도를 보아서 그에 맞게 제도를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서가모니부처님이나 예수님 당시에 이런 물질문명의 현상과 폐해를 이야기한들 그것이 상상이나 되었겠으며, 자신들의 문제라고 수용하려 했겠는가.

대종사님께서는 바로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류가 당하게 될 고통을 예견하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전해주기 위해서 오신 이 시대의 구세성자이시다. 과거의 숱한 종교들에 종교 하나가 더해진 정도의 의미가 아닌, 원불교가 태어나야만 하는 절대적 요청이며, 이것이 곧 개교의 동기이다.

물질과 과학의 발달은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며 대종사님의 가르침 또한 물질문명을 거역하거나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하자'하신다. 그것은 '잘 사용'하면 인류를 무지와 질병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류의 편리를 돕는 신낙원(身樂園)을 만들어 줄 것이요, '잘못 사용'하면 재앙, 파란고해로 이끌 것이다. 잘 사용하려면 어떤 힘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적 종교를 신앙함이요, 사실적 도덕으로 훈련함이다. 진리에 바탕한 종교, 즉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을 가르치는 종교를 믿으며, 그 진리를 닮아가는 사실적인 수행을 통해 마음의 힘을 갖춰야 한다. 이 힘은 영생의 심낙원(心樂園)을 만들어 준다. 이 두 낙원을 아울러 누리는 것이 바로 광대무량한 낙원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바르게 믿게 하고 그 진리를 깨쳐 부처 만드는 일이 대종사님께서 법을 새로이 펴시게 된 근본 목적이다.

교화의 목적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숫자를 더 늘려서 종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파워를 갖는 데에 있지 않다. 물질만능의 현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낙원으로 인도하여 성불의 기연을 맺어주는 것이 대종사님의 새 법을 펴신 개교 동기요 교화의 참 의미이며 연원달기의 본래 뜻이다. 이는 또한 전 교도들의 서원이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해에 헤매는 사람들을 낙원으로 안내하는 실력 갖춘 안내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가슴인들 고통없이, 아픔없이, 만만하게 사는 영혼이 있으랴. 그들의 소리없는 절규를 마음으로 듣고 그 아픔을 공감하며 파란고해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배가 얼마나 크고 성능이 좋으며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자랑할 필요는 없다.

자신은 정작 헤엄칠 줄도 모르거나 구원 장비인 보트나 밧줄 하나 없이 목소리만 높이고 있지는 않는가. 그 선장들이 고통받는 생령들이 있는 바다로 나아가기는 커녕 안전한 부두에 정박한 채 스피커만 최대로 틀어놓고 유유자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들을 건져 줄 수영실력, 구원장비, 운전실력 등을 제대로 갖추고 파란고해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고해가 고해가 아님을, 고해가 그 자체로 피안이고 낙원이며 진리이자 본성임을 문득 알게 된다. 고해라고 믿었던 그곳이 이면에 아름다움 가득한 다채로운 평화의 낙원이요 배움터요 놀이터임을 아는 순간이 온다. 바다 자체는 고통스러움이 없다. 스킨스쿠버를 하는 사람이나 수영실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짜릿한 놀이터가 아닌가. 파란고해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 이것이 광대무량한 낙원에 참으로 이른 모습이다.

대종사님의 개교동기가 나의 서원이 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늘 안목이 깨어있어야 한다. "대종사님의 심경으로 아파트의 불빛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차량과 행인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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