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의 익산성지 모습.
가정의 달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고 그에 따라 어린이날이면 부모님과 놀러가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또 어버이날이면 카네이션을 사서 부모님께 달아드리던 기억, 할아버지 할머니께 전화해서 아버지부터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안부전화 드리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라도 보내드렸던 어릴적 기억이 새롭다.

이러한 기억을 가지고 오늘날 신문을 보면 내가 어릴적 살아오던 세상과 너무 달라진 세상이다. 이혼, 가정폭력, 노인문제, 거기에 교권추락과 함께 보여지는 학교폭력문제 등은 우리가 어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지금이 너무나 다름에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초기 우리 교단의 가족 같은 모습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초기 대종사 재세시 불법연구회는 재가 출가가 다 같이 인근에 집을 짓고 함께 살고 있었다. 그렇게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중에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 속에 그리고 대종사의 사랑 속에 성장을 했다. 그 어린이들이 오늘날 우리 교단을 이끌어주신 선진들이 됐다.

아이들은 언제나 대종사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어 했으며 매일같이 문안인사 드리는 것이 생활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또래 아이들 3명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 아이가 늦게 나와서 둘이서 문안인사를 드리고 온 적이 있다.

그러면서 대종사에게 그 아이는 늦게 나온다고 고자질을 했다. 그것을 알게 된 늦게 나왔던 아이는 두 친구보다 더 일찍 나오게 되고 결국에는 서로 일찍 가서 먼저 인사하기 경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은 대종사가 일어나기도 전인 꼭두새벽에 문안인사를 하게 되자 대종사의 지도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같이 와서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공동체 생활 속에 부모도 자녀도 마음에 어른을 모시고 생활하는 것, 예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운데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으로 느껴질 이 선진들의 일화는 오늘날과 같이 가정폭력이 난무하고 온라인 게임과 자극적인 내용이 가득한 미디어 속에 자라는 아이들, 인성과 지성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는 교권이 추락하여 아이들의 교육이 인성교육이 아닌 입시위주의 경쟁으로 심화되는 교육정책으로 가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한편으로 그리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 교단 초기 불법연구회 전경.
이러한 불법연구회의 공동체 생활이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불법연구회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가족 같은 교단이었지만 남녀문제와 금전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히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젊은 남녀 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어르신의 입회하에 만나서 용건을 이야기 하도록 하였으며 금전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히 관리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에서는 백백교사건이 일어났다. 백백교사건은 사이비 종교가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제는 불법연구회를 해체시킬 빌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종사의 기거하던 곳은 금강원으로 여자숙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를 문제를 삼지 않을까하여 늘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불법연구회 내에 있던 신영기 씨가 이리 시내로 이사를 가게 됐다. 마침 그 집에는 대산종사와 그의 정토 의타원 이영훈 종사가 세를 들어 신혼살림을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을 교단에 희사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어 대산종사 부부는 당시 숭산 종사가 쓰던 방으로 들어와 살게 됐다. 대산종사 부부가 십타원 종사의 사가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당시 정산종사의 사가 역시 십타원 종사와 같이 쓰고 있었으니 교단의 1대 2대 3대의 종법사 사가가 한 지붕아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교단의 역사에서 근검 절약을 주장하고 지공무사를 실현하는 우리 선진들의 정신가운데 1~3대 교조가 한 지붕에서 생활을 했던 것만으로도 어렵고 가난한 가운데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살아갔던 법답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연 속에 대종사의 숙소는 사무를 보던 영춘헌으로 옮겨지고, 교정원 사무실은 대산종사가 신혼살림을 하던 신영기 씨의 사가로 옮겨지게 된다. 그곳이 지금의 구정원이다. 구정원은 교정원 사무실로 사용되어 진 후 원기49년에 다시 신축을 하여 식당을 옮기고 남자숙소로 사용이 되고, 반백년 기념대회 때는 기념대회 사무실로 사용이 되었다. 그 후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현재 구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구정원.
구정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영기 씨가 오면서 사용하던 집이었다. 그러면 불법연구회시절에 함께 사가를 이루며 살아 왔던 선진은 누가 있었을까? 익산 총부에 맨 처음 들어왔던 사가는 전음광 일가의 집으로 원기 10년경에 들어왔다.

그의 집은 병인년 초선 때부터 부인선방으로 빌려서 사용이 됐으며 그로부터 2년 뒤 서중안 일가가 이주해 오고, 이청춘이 이사를 오게 됐다.

이들의 사가는 꼭두마리집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한길을 면해 차례대로 이청춘, 전음광, 서중안의 순으로 집이 있었다. 또한 구정원 옆으로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의 집이었던 정신원이 있었으며 현재 총부 정문에 들어서 오른쪽의 첫 번째 집인 청하원은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사가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 외에 여러 선진들의 사가가 더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곳도 있다.

요즘과 같이 이혼문제, 가정교육문제,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 참된 인성과 사회를 이끌어 나갈 청소년들의 건전한 가치관과 교육을 생각할 때다. 각자의 마음속에 스승님을 모시고 또는 닮아가고 싶은 분을 마음에 모시며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 청소년들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대두되지는 않을텐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다.

불법연구회 당시 대종사와 우리 선진들의 훈증 속에 생활했던 선진들의 어릴 적 삶이 한편으로 부럽다. 이 시대의 유소년기와 사춘기를 겪어가는 학생들이 건전한 신앙과 바른 가치관을 이끌어줄 스승을 찾아 바르게 성장하여 우리나라의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세 들어 살던 집까지 내놓고 한 지붕에 세가정이 살던 선진들의 심법과 근검했던 창립정신을 떠올리며 선진들께 감사를 드리며 늘 타성에 젖지 않기를 바라면서 금새 마음이 풀어지는 나를 오늘도 다독거리며 감사와 다짐의 심고를 올린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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