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어느것에도 미련 두지 않는 가슴으로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파슈파티나트 사원에는 화장터가 있다. 영결의식이 끝난 시신의 재는 바그마티 강에 그대로 뿌려진다.
4월18일 여행 닷새째,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지독한 먼지와 매연,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길 위에 뒤엉킨 차량과 날카로운 경적소리, 다닥다닥 붙은 길 옆 상가의 볼품 없는 상점들, 그 너머로 어지러운 전깃줄, 지저분한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내미는 손 뒤의 깊은 눈길….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카트만두는 이제 고도(古都)가 간직하고 있는 빛과 그림자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더 이상 예스러운 빛은 바래는 듯 한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규격화된 일상의 내 모든 생각을 지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신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숴염부나트'란 스스로 생겨난 땅이라는 뜻. 히말라야에서 가장 오래 된 사원이다.

365개의 돌계단으로 된 참배도로를 올라갔다. 한 계단을 오르면 하루의 공덕을 쌓는 것이니, 모든 계단을 오르면 1년의 공덕이 되는 것이리라.

스투파(불탑) 정면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거대한 금강저(Dorjee)가 안치되어 있었다. 인간이 갖는 욕망과 집착 등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무명(無明)을 없애는 것으로 불교의 일파에서 쓰이는 밀교의 법구(法具)다.

스투파를 시계 방향(오른쪽)으로 돌아보며 경내를 산책했다. 불교 경전에는 제자가 부처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존경심을 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원시불교 이래의 관습이다.

스투파에 새겨진 '부처의 지혜(智慧)의 눈'은 변함없이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탑에는 귀와 입이 없다고 한다. 인간 번뇌는 '나쁜 것을 들음으로써, 거친 말을 함으로써' 비롯되니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 숴염부나트 사원의 스투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파슈파티나트 사원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이르는 좁고 지저분한 내리막 골목은 힌두의 신을 경배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의 손에는 골목에 늘어선 노점에서 산 노랑꽃과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물 그리고 때 묻은 동전 몇닢이 들려 있었다.

그 공물을 시바신의 현신인 파슈파티나트에 바치고 현세와 내세의 복을 기원한다. 사원길을 따라 곡물을 뿌리며 고수레를 하고, 힌두 수행자인 사두와 걸인들의 보자기에 찔러 넣기도 한다. 사원길 바닥은 흩뿌려진 곡물과 꽃잎으로 황금을 두텁게 입힌 듯 누렇게 빛을 발했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힌두교인들의 화장터이기도 하다. 사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바그마티 강 양 옆의 제단 한쪽에 화장을 위한 제단이 놓여 있다. 삼단으로 쌓인 굵은 장작 위에 눕혀진 시신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가족들의 영결의식이 끝나면 얼굴 위까지 한 겹 천이 덮어지고, 어깨와 다리, 허리로 뜨거운 불이 들어간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붉은 불꽃, 그리고 사원 전체에 감도는 향내와 살이 타는 냄새가 뒤섞였다. 다 탄 재는 바그마티 강에 그대로 뿌려진다.

다른 한 쪽의 사람들은 그 물에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한다. 어떤 이는 손으로 물을 떠 공중에 뿌리며 무언가를 기원한다. 도대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고 또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스투파에 새겨진 '지혜의 눈동자'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직 혼돈, 그 자체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 동물이나 갖은 형상을 숭배하는 사원들.

마음을 빼앗긴 네와르 건축, 파탄

무려 3천3백만 종류의 우상을 숭배하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네팔은 크고 작은 신전이 산재해 있다. 신전에는 동물이나 갖은 형상을 표현한 그림과 우상을 새겨 놓은 조각상을 안치해 놓고 있다. 그 주변에는 붉은 가루를 뿌린 검은 돌이나 작은 나무 등으로 치장한다. 대다수의 네팔 사람들은 매일 새벽 3시부터 지성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자신들의 신을 숭배하고 있다.

불가사의한 도시, 그 낯설음을 가슴에 묻은 채 파탄으로 향했다. 미의 도시란 뜻의 랄리트푸르(Lalitpur)라 불렸던 파탄에는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의 전시장이다. 대를 이어 그림과 공예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이 옛 터전에서 그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파탄의 더르바르 광장은 석조사원과 목조사원이 함께 있다. 파탄 사원은 건축적인 완성도가 뛰어났다. 섬세하면서도 단아하고, 정교하면서도 조각 하나하나에 담긴 온화한 미소까지, 사원은 네와르 인의 손 끝에서 비로소 중세 왕궁의 보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신을 향해 감사하고 숭배하며 기도를 드리는 인간의 정성, 그것은 네와르 조각에서 더 할 나위 없는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조각된, 살아있는 건축물 앞에서 이내 가슴이 먹먹해 졌다.

문득, 모든 것을 그냥 놓아 버려야 한다는생각이 들었다. 어디에도, 어느 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가슴과 눈이 아니라면 그 생경한 일상에 온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일이다.

카트만두에서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의식조차 버려야 했다. 적어도 카트만두에서는 그렇게 마음을 텅 비워야만 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