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승지 교도 / 하단교당
옛 부처님께서는 '세상은 쉼 없이 변해가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새 부처님이신 대종사님께서는 그 변화가 너무도 빨라져 감을 보시고 '어서 정신을 개벽하자'라고 하셨다.

원불교 개교 97년, 그 동안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가와 사회적으로는 해방,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의무교육, 과학입국, 복지정책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으로는 먹고, 입고, 자고, 말하고, 쓰고, 생각하고, 일하는 것, 심지어 몸과 얼굴, 가치관과 사고방식까지도 달라졌다. 이 정도면 유럽처럼 다른 문화권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문화권으로 교화를 하려면 당연히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청·장년 교화에 있어서도 결코 해외 교화에 못지 않는 비중으로 많은 교화의 고민이 있어야 될 것이다.

개교 당시의 참신하면서도 혁명적인 교리와 유리알처럼 투명한 교단 운영 등은 이제는 일반 사회에서도 상당부분 보편화가 됐다. 지난 날 대중들에게 어필되었던 참신성과 혁신성은 상대적으로 그 빛의 밝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신선했던 이미지 역시 점점 약해지고 있는 듯하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은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능동적으로 변화해 가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벽 정신은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을 보완하거나 수리해서 쓰자는 것보다는 나의 것 남의 것을 가리지 말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와서 쉽고 간편하게 고쳐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냐','해로운 것이냐'의 기준이 있었을 뿐. 어떠한 형태나 방향성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벽의 대상이 된 것은 굳어진 신념과 정해진 방향성이었다. 어느 한 시대 상황에서의 기록인 경전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고, 눈과 귀로 읽고 듣는 것이 아닌 그 시대의 허공으로 그 상황의 마음으로 읽고 듣는 것이었다.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으로서의 개벽이었던 것이다.

'진행형으로서의 개벽'이라는 명제와 '원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 사이에는 일면 서로 상반되는 문제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일정한 형태나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고도 '낮은 곳으로'라는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흘러가듯이 우리도 물처럼 '자유로운 정체성'을 갖추기만 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국가와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나가야 할 것이며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상황을 넘어서는 보편적 포용성과 이해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실천 강령으로서의 사요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상황을 반영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재해석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일선 교화 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교화 방법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당마다 특화된 다양한 교화 프로그램이 년중 운영되고 있어서 각자의 특성과 필요에 따라 이 교당 저 교구로 배우러 다닐 수가 있게 된다. 더욱이 이러한 분위기 변화는 교도 가족들이나 일반인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0년 20년을 모아서 주기적으로 혁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달마다 혁신해 가는 것이 능동적인 개벽일 것이다. 능동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읽어 내는 것이며, '새로움'을 보다 발전적인 것으로 해석해 가는 것이다. 원기100년대는 꿈에 그리던 통일과 함께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개교 표어에 걸맞는, 능동적이어서 더욱 자유로운 원불교 특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출가 재가 모두가 함께 노력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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