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수 교도 /  장충교당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다. 이유는 단순하다. 복잡해서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교법에서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할까.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불행지수가 높은 나라를 연구해 보면 이런 결론도 있다. 전쟁을 하거나, 정치가 불안할 때는 불행지수가 높다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정보를 접하고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래 사람은 예상이 되는 내일이 없으면 불안해지는구나하고 말이다.

부탄 등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에 농경 국가가 많은 이유는 농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예상되는 내일이 좀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사회에서는 급여를 많이 받고 안받고를 떠나서 불안감이 훨씬 많다. 몇 달 작성해서 만든 신상품 기획이 실제로 시장에서 통할지 예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올해의 사업실적이 내년에도 통할지 예상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신입 사원이 왜 불안한가. 명예 퇴직이 왜 불안한가.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력은 어디로 가고 왜 불안감만이 남아 있는가. 그 이유는 '내일이 예상'이 안되면 사람은 누구나 불안해지기 때문이라는 내 나름의 결론이다. 사실 그렇게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보수적이다.

내일이 안보일 때 불안한 이유는 모든 사람은 그냥 그렇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가 심해지는 이유도 이 내일이 안보일 듯한 불안감 때문이다. 새로움이 주는 엄청난 편리함 다 필요없다. 편리한 만족감이 불안감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 자리가 좁아질 듯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에도 역시 보수화 증상은 심해진다.

전국의 모든 사찰 처마 밑 동그라미 세 개는 삼법인이라고 해서 진리의 상징이다. 그 동그라미 셋중의 하나는 제행무상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이다.

대종사님께서 설하신 수많은 법문 중에 첫 번째로 하신 법문이 무엇인가. 일부러 그러신 것인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변화와 관련된 부분이다. 최초법어 첫 번째 줄이 다음처럼 시작한다.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 놀라운 말씀이다. 변화를 전제로 해서 사람의 생존법을 수신(修身)이라는 이름으로 설하셨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움이 많아 머리가 아플 상황을 예상 하신 듯 말씀 하신다. 스마트폰 말고도 세상은 계속해서 많이 많이 변할 터이니 제발 변함에 대해서 만큼은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라고 말이다.

스마트폰을 빼고도 새로움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민심, 세계질서, 대중들의 학문 수준, 정보의 양적 변화와 빠른 전달력 등등 정말 다양하다. 제도의 변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국회에서의 법 제정뿐 아니라 지금 교단내에서의 제도 정비도 마찬가지다. 충돌되는 제도도 마찬가지다. 개별 교당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새로움이 요청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멈춤으로 결론이 난다. 이거 대종사님에 대한 불효이고 역사에 죄 짓는 행위다.

악화가 양화를 쫒아내는 법이다. 현재가 좋다는 사람들이 남아서 '이거 불만이면 너희들 나가라' 하고 얘기를 한다면 개혁은 이미 물건너 간 상황이다. 개혁이 시간적으로 불가해서 교단을 새로 만드는 분파적 형태로 방법을 취하신 대종사님과 똑같은 상황이다. 자체 개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분열을 만들어 낸다. 좋은 사람들을 정 떨어지게 만들어 내보내는 분열상들을 계속해서 만들기 때문이다. 분열의 결과는 무엇인가. 멸망이다.

예상되는 내일을 만들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행복추구가 이상하게 변질되어, 자신을 보수화시키는 자신의 모습을 제발 관(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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