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제민 교도·분당교당(논설위원)
1일은 소태산대종사의 열반일이자 원불교신문 창간일이다. 대종사께서 열반을 1년 앞두시고 남기신 말씀 중에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이 법을 알아보고 크게 감격하고 봉대할 사람이 수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대종사님 열반일에 생일을 갖게 된 원불교신문은 이 법을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할 사명을 갖고 탄생했다고 본다.

그동안 원불교신문은 43년 전인 원기54년 원불교청년회보를 발전적으로 폐간하고 격주간, 순간, 주간으로, 판형도 타블로이드판에서 대판으로, 다시 베를리너판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꾸준히 발전해 왔다. 이러한 변화들은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온 과정이었는데 이제 또 다른 큰 변혁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빌게이츠와 스티브잡스의 합작품인 세상의 급변, 즉 무선 전파에 의해 개인의 손바닥 위로, 또는 개인의 책상위로, 시간 지체가 없는 실시간으로 칼라 동영상까지 포함한 정보가 무시 무처로 수집될 수도 전달 할 수도 있는 시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종이 신문의 구독자 수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신문 위기론이 거론되면서 신문 경영인들은 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방향의 다양화를 연구 중이다. 예를 들면 기자는 사건 보도 보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스토리 텔러(story-teller)가 되어야 한다 던지 정보전달 보다는 지식전달에 중점을 두라던지 나아가 그러한 내용들이 모바일과 연동되어야 신문의 약점이 보완된다던지 하는 여러 방편들이다.

이러한 처방들은 구독료와 광고수입에 사업의 성패를 걸고 있는 상업 일간지 회사의 주요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원불교신문도 일반 신문들처럼 세상의 속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참고하고 연구해야 할 사항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원불교신문은 한 가지 신문의 독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는 소위 4대 일간지들, 아무런 특징도 없고 사건 사고 소식과 정치 험담 또는 특정 정파 지지로 지면을 메우는 그런 신문들이 앞으로 먹고 살길을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걱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보통 신문들과는 태생적으로 탄생 배경이 다르고 목표와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낙원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분명한 콘텐츠를 이미 갖고 있다는 면에서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걱정할 일이 아니라 본연의 목적에 얼마나 충실히 잘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원불교신문은 살기 감도는 세상에 동남풍을 불리는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전쟁의 포연이 안개처럼 끼어 있고 화약 냄새의 불쾌감은 생선 비린내처럼 남아 있다. 한반도에서는 미사일과 핵과 불바다의 위협 속에 우리아들들이 군인 가서 죽어 나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전쟁 감각으로 거칠어져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가씨들이 살 빼는 것도 살과의 전쟁, 물건 값 할인하는 것도 가격파괴 폭탄세일, 모기 퇴치도 모기와의 전쟁, 공교육 정상화도 사교육과의 전쟁, 살벌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이 불모지에 원불교신문은 언 땅을 녹이는 봄바람 실은 동남풍의 소식으로 사람들의 얼어붙은 심장을 다시 평화와 행복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게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나서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 슬픔이요 고통인줄 알면서 죽어 내생에 가서나 행복을 찾을까나 하고 사는 중생들에게 존재 자체가 은혜의 산물이요 주어진 삶은 감사함임을 새롭게 알려주는 아! 처음 듣는 그 하늘의 말씀, 신기로운 메시지….

정당한 도를 밟으매 잔재주가 필요 없고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하던가. 일원의 소식을 전함에 원불교 울타리도 걷어 버리고 대문을 열어 젖혀야 한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둥글다고 할 때 아무라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먼 바다로 나가서 신대륙을 볼 것이다. 갈릴레오 파에 입당하면 둥글고 입당하지 않으면 지구가 네모 나는 것이 아니다. 원불교신문을 원불교 교도가 보는 신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종사님의 일원대도는 원불교 울타리안의 도가 아니라 우주의 도임을 믿어야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