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아픔 속 일원상 품고 있던 대각전

▲ 교단의 위용과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각전은 후일 증축과 보수공사를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익산성지를 들어서 왼편으로 올라가면 종각을 거쳐 대각전에 올라올 수 있다. 처음 이곳은 복숭아밭이었다. 원기20년 3월부터 터를 다지고 공사를 시작해 4월27일 총 대회를 기념하여 준공이 됐다.

그 당시에는 이 건물의 규모가 매우 큰 건물이어서 솜리(익산의 옛 이름)에서 구경을 올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몇몇 선진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는 당시 익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대피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법연구회의 대각전이 큰 건물이라 이곳에서 대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인연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불법연구회에 대한 좋은 인식이 더 확산되었다고 한다.

대각전이 건축되면서 교단 최초로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했다. 그리고 공회당에서 진행하던 예회나 선(禪)을 이곳에서 주로 진행하게 됐다.

특히 대종사 열반전 최후 법문(대종경 부촉품 14장)을 설하신 장소이기도 하며, 반백념기념관이 건축되기 전까지 교단의 중요행사는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대각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일원상을 봉안해 많은 교단적 역사를 지내온 중요한 건물이다. 그래서 성탑과 함께 전국의 교도들이 성지순례 시 꼭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종법사 대중 접견장소로 사용되며 지금도 새벽에는 좌선을 하고 밤에는 100년성업기도를 하는 곳이다.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 익산성지 순례 당시 성지를 안내해주는 교무로부터 "날아가는 새도 제도 받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대각전"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성스럽고 교단의 중요한 역사를 함께해 온 대각전은 교단의 기쁨만큼 아픔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제치하에서의 수난, 대종사를 떠나보내던 아픔과 한국전쟁 당시 정산종사가 뒷방에 기거하고 남자교역자들이 생활을 했던 사연, 그리고 폭격을 비롯한 많은 위험과 역경의 역사를 안고 있는 건물이다.

원불교 총부의 시련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이 익산을 점령하면서 호남 주둔군 본부를 익산총부에 두게 됐다. 어수선한 나라 상황 속에 공산군이 오기 전에 총부에 근무하던 교역자들은 피난준비와 함께 원명부를 포함한 주요물품 및 문서들은 대각전 천정에 감추고 지방, 사가 등지로 피난을 갔다. 정산종사를 포함한 몇몇의 교역자들이 남아 총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월19일 마침내 공산군이 익산에 진입했다. 경찰 50여명이 이곳에 잠입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개 소대가 익산총부를 수색하게 되면서 교단의 시련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위협 속에 총부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곡식을 약탈하고 떠났다. 그 후에도 소규모 혹은 대규모의 부대가 여러 차례 점령하고 약탈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결국 8월3일에 1개 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총부 정문의 원불교 간판을 떼어내고 그들의 부대 간판을 걸었다. 이로써 원불교총부는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고 공산군호남주둔군본부가 됐다. 총부 식구들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으나 다행히 종법실, 대각전, 정미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총부 간판을 대각전 뒤쪽의 모퉁이에 걸었다. 정미소 및 대각전은 길가에 위치하였거나 공중에서 표적이 될 만한 건물이기에 순순히 내어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며 대중들은 유일정미소와 대각전에서 생활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군은 인민위원회를 통하여 토지를 몰수하고 총부 구내에서 약탈한 가축을 잡아먹고 버려두면서 성지 도량으로서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또 약탈한 양식을 지역주민에게 배급하는 형식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도 총부를 1가구로 계산하여 배급하여 힘든 시절을 보냈다.
▲ 과거 대각전의 모습.
총부 상공의 서기

익산총부가 시련을 겪는 가운데 한국전쟁의 상황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어가면서 유엔군의 공습이 강화됐다.

호남군사령부가 있고 호남지역의 공산군에게 이송되는 군수물자가 쌓여있는 익산총부는 유엔군의 폭격을 걱정하며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으나 다행히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후일 북한군이 철수하고 난 후 미군 비행기 조종사가 총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정산종사께 인사를 하면서 "원불교총부에 북한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고 하여 폭격을 하려 여러 차례 상공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상한 서기가 어려 있어서 폭격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목천포에 폭격을 하고 돌아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마침내 북한군이 철수를 하고 난 후 공산군 내부에서는 "총부에 있던 건물들을 다 불태우자"는 논의가 있었다. 북한군 부대장은 "건물들의 재목이 좋은 것이 아니다. 부르조아가 인민의 재산을 착취해서 만든 재산이 아니다. 인민의 재산이니 불태울 것이 없다"고 하여 총부는 다시 한 번 위기에서 모면할 수 있었다.

북한군도 물러가고 총부는 다행히 건물이 손상되지는 않았지만 건물 구석구석이 다 훼손되어 있었다. 물픔들 역시 없어지고 부서져 있었다. 어수선한 총부를 정비하면서 원불교 총부의 현판을 대각전 뒤쪽에서 다시 총부 정문으로 옮기려하자 정산종사는 며칠만 더 두고 볼 것을 지시했다.

며칠 후 국군과 경찰이 와서 큰 피해가 없는 총부를 보면서 공산군에 대한 협조에 대해 의심을 품었으나 총부의 현판이 대각전 뒤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그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새시대 교법의 산실

대각전은 한국전쟁에서 정산종사를 포함한 교역자들의 숙소로 이용 되기도 했고 원불교총부의 현판이 달렸던 곳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 건립된 건물로 식민지의 아픔을 담고, 동족상잔의 아픔 속에 교단의 위용과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각전은 후일 증축과 보수공사를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하려드는 물질의 노예생활로 빚어진 파란고해 속에 주세경륜의 세상에 나오신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일원대도 교법, 그 법신불 일원상이 최초로 봉안되어 오늘까지 교단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으며 오늘날의 위용을 간직한 대각전이다.

교단의 역사 속에 얽혀있는 일원대도 교법과 대종사의 자비경륜은 이제 새 시대를 맞이하며 아픔과 상처의 역사를 안고 있는 대각전에서 이제 우리들로부터 새 시대 새 교법의 산실이 되고 일원대도의 교법으로 만생령을 구제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성해야 한다.

백년성업의 기도문에서처럼 우리 교단이 세계 주세교단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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