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보고 싶었던 그 길들, 담양 3림

사철 초록의 세상일까. 며칠째 몸도 마음도 무겁게 시작하는 아침이었다. 제법 신록을 더해가는 자연은 그대로가 위안이 될 터, 일상의 아침을 재촉해 담양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면 몸도 마음도 가만히 끌어 안아줄 것 같았다. 천천히 그리고 오래오래 걷고 싶은 길, 담양3림에서 전해지는 바람 소리가 쏴아~ 귓전에 머문다.

서로를 잇고 있는 초록의 생기

전남 담양은 영산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마골생태공원에서 발원한 영산강 물줄기는 담양을 관통한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따라 아름다운 길을 놓았다. 담양수목길은 영산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숲길인 것이다.

길은 대나무 숲으로 명성이 높은 죽녹원에서 시작했다. 촉촉이 물오른 나무 길을 따라 죽녹원에 들어섰다. 165,000㎡를 가득 메운 대숲의 위용이 만만치 않았다.

분죽과 왕대, 맹종죽 등 대나무가 빽빽이 서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길이 이어졌다. 초록의 생기를 받는 대나무 삼림욕장이다.

길모퉁이에 세워진 이름도 잘 어울린다. 체험마을 가는 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운수 대통길, 선비의 길, 철학자의 길, 성인산 오름길, 죽마고우길, 추억의 샛길 등 모두 3.35㎞나 된다. 산책로는 8개의 다양한 이름을 달고 서로를 잇고 있었다.

담양의 숲에는 여느 곳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히 조화된 구불구불한 산책로,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초록의 생기가 몸으로 흠뻑 스며든다. 맑고 시원해 머릿속까지 상쾌해졌다.

둥근 대나무를 휘감고, 또 휘감아 스쳐온 바람은 어느 숲의 바람보다 부드럽다. 그 바람에 흔들려 서걱대는 댓잎의 소리는 마음 속 잡념을 털어낸다.

무거웠던 몸과 마음에도 파릇한 생기가 돋는 듯 평온함이 자리한다. 대숲에 스미는 햇살, 내 안에도 오랜만에 눈부신 햇살이 스몄다.
▲ 관방제림 숲길은 아늑한 쉼의 길이다.
고단한 삶 달래주는 쉼의 숲

죽녹원을 나오면 정겨운 개천이 기다리고 있다. 담양천이다. 향교교를 타고 담양천을 건너면 왼쪽으로 관방제림 둑길이다.

말 그대로 관에서 둑에 조성한 숲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제방림으로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사나운 물길을 막기 위해 둑을 따라 한 그루 두 그루 어린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오랜 세월 제자리를 지키다 늙어갔다. 농사를 위해 만들었던 숲은 이제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희망을 가슴에 품게 하는 쉼터가 되고 있었다.

관방제림은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검증' 받은 숲이기도 하다. 나무껍질에 푸른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은 팽나무는 큰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부른다. 그 옆 곧게 서있는 느티나무가 보이고, 용의 발톱처럼 세 갈래 뿌리를 땅에 박고 있는 푸조나무, 봄날 화려한 꽃과 한때를 보내고 지금은 푸른 잎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벚나무까지 177그루가 오랜 세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00년 이상 된 노거수가 2km가량 둑을 따라 늘어선 제방길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사람 서넛이 둘러싸도 부족할 만큼 둥치가 우람한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서로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모습 같았다.

색색의 꽃이 아니어도 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제방 숲길, 그 길을 따라 걷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다정하다. 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농부의 얼굴 또한 평화롭다. 잘 자라준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깊고 아늑한 쉼터, 그렇게 관방제림은 편안하고 아늑한 쉼의 길이고 쉼의 숲이었다.
▲ 죽녹원 죽마고우길.
함께 여도, 혼자 여도 좋은 길

제방을 건너오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메타세쿼이어를 만나게 된다. 담양읍에서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와 만나는 길이다. 팔을 벌려 안아도 닿지 않는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60~70미터 높이로 치솟아 있다. 금방이라도 나뭇잎에서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만 같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운치 있는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은은하고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는 벤치 바닥에 자리해 있다. 초록의 큰 나무들이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람들의 배려도 이렇듯 넉넉했다.

영화 '가을로'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길은 늦가을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쁘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 텐데. 사람들은 그 길을 잊고 이 길을 또 달리겠죠." 민주의 마지막 대사내용이었다. 영화 속 여 주인공처럼 '힘없고, 새로 시작하고 싶고, 그럴 때 떠나고 싶은' 이 길은 바라보는 것 만 으로도 편안한 숨이 쉬어진다.

남자 주인공 현우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다듬었다. 저 만치 길게 이어진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나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생각케 했다. 함께 여도, 혼자 여도 좋은 이 길에서 난 몸도 마음도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누구라도 이 길에선 자신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록빛'이 아련하게 닿는, 죽림3림은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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