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식재료로 만든 묵은 맛있습니다"

▲ 필링 레스토랑 계단에 선 박현철(오른쪽), 박민영 부부.
푸름이 넘실되는 산에 오르다 보면 예외 없이 참나무들을 만난다.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등이다. 이들 열매들을 도토리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재롱이라 불리는 졸참나무 도토리는 묵을 쑤었을 때 가장 맛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맛을 찾기 위해 남원의료원 근처에 있는 뱀사골식품으로 향했다. 박현철(44)대표를 만나기 위해서다. 가공 공장에서 만난 그의 얼굴을 보니 성실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공장 곳곳에는 맛있는 묵 맛을 재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그의 노력이 배여 있었다.

"30년 전에는 국산 도토리가 그런대로 채취가 되었습니다. 수량이 많지 않아 국산 도토리와 중국산 도토리를 섞어서 묵을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자연보호법으로 인해 채취가 금지되어 있어 국산 도토리는 귀해졌습니다. 물량 확보에 애로사항이 있어 부득이 하게 중국산 재롱이를 쓰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재롱이는 참나무 열매 가운데 크기는 가장 작고 길쭉하며 껍질이 얇고 가루가 많이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수입회사의 샘플을 몇 군데 받아 직접 묵을 쑤어 보는 것만 봐도 고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그의 풍부한 경험이 한 몫하고 있다.

"지리산 바래봉 철쭉제로 유명한 운봉 용산마을에서 묵을 만들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묵을 쑤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거든요. 잠시 외지에 나가 직장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묵과 함께한 세월이었습니다. 수입산이라도 좋은 등급의 도토리 원두를 쓰고 있어요."

9년째 뱀사골 식품을 운영하고 있는 그가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는 데는 자신감이 한 몫 하고 있다. 재롱이로 묵을 만들면 찰기가 많고 부드러워 그 맛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모양이 둥글고 다갈색인 상수리 나무 도토리에 대해서는 묵으로 쑤어먹으나 찰기가 적어 쳐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밝혔다.

"말린 상태로 들어오는 도토리 원두일지라도 육안으로는 품질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끓여보면 품질과 맛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량으로 구매하기보다 소량 구매를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객들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이 방법을 유지할 것입니다."
▲ 큰 솥에서 도토리묵을 끓이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 말이 끝나자 그는 놓여져 있는 기계들을 설명한 후 도토리 원두의 가공 순서인 6단계를 이야기 했다. 묵으로 나오기 까지의 과정이었다. 그는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고 있는 묵을 가르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손짓을 더해가며 설명하는 그의 진지함은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먼저 도토리 원두를 석별기에 넣고 돌을 골라낸 다음 2∼3일 물에 담가 탄닌 성분인 떫은맛을 우려 냅니다. 이때 여러 번 물을 배출 시키죠. 이어 맷돌에 갈아 앙금 짜는 기계인 여과기에 넣고 토토리 비지인 찌꺼기를 걸러냅니다. 앙금 부분만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시 물과 도토리 앙금을 잘 배합하여 직화(가스불)로 묵을 쑵니다. 그런 후 벌크판에 식용비닐을 깔고 묵을 담지요. 젤리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8∼9시간 걸립니다."

간단한 설명 같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는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굳이 도토리 원두를 사용하여 묵을 끓이는 것은 깊은 맛과 연관이 있다. 묵 끓이는 과정에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1분만 더 끓여도 묵 맛이 완전 달라진다는 것이다. 눌려지는 관계로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도토리 가루로 묵을 끓이면 편하기는 합니다. 과정들이 생략되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저의 신념입니다. 봄, 가을에는 묵을 약간 묽게 끓이고 여름이면 되게 끓입니다. 이렇게 묵 농도를 맞추는 데는 오랜 경험이 필요합니다. 오래 하다 보면 터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흘러내림을 보고 알 수 있지요. 묵을 끊일 때는 어느 누구의 전화라도 받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묵을 끓이니 입소문을 탔나 봐요. 전국에서 전화가 옵니다. 명절에 80% 나가고 있고 부산 금정산성과 한정식 집에서 많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주로 택배로 배송되고 있죠."

그는 도토리묵 파생 제품인 건조묵(묵 말랭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건넸다. 묵은 스텐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여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 청결한 시골 옥상에서 이틀정도 말리면 된다는 것이다. 덜 말리면 곰팡이가 끼고 더 말리면 깨질 염려가 있다는 건조과정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의 곁에 있던 아내 박민영(42)씨는 다양한 건조묵 요리에 관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4년 전에 결혼한 만큼 남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틈틈이 택배 송장(送狀)을 담당하며 남편을 돕고 있는 아내는 요리에 관해 말할 때 눈빛이 빛났다. 요리에 관심이 많다는 증거다.

"건조묵을 식용유에 튀기면 과자 느낌이 들어 아이들 간식거리로 좋습니다. 이외에도 하룻동안 미지근한 물에 담가 불린 후 끓는 물에 20분정도 삶아내 물기를 뺍니다. 그런 후 불고기양념으로 버무릴 때 잡채에 고기 대신 사용하기도 합니다. 도토리 묵 잡채가 되는 것이지요. 탕에도 사용할 수 있고 떡볶이 떡의 대용으로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 식용비닐을 깔고 열기를 식히고 있는 도토리묵.
▲ 올방개묵 요리.
아내를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던 그가 별미인 올방개 묵과 깨묵의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논이나 연못 등 축축한 지역에 군생하는 사초과(莎草科)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인 올방개 덩이줄기를 갈아서 가라앉힌 앙금으로 쑨 묵이라고 밝혔다. 깨묵은 올방개와 볶은 흑임자 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거의 재배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주로 수입합니다. 덩이줄기를 말려 가루낸 후 끓이면 올방개 묵이 됩니다. 청포묵 비슷하나 찰지고 쫄깃 쫄깃합니다. 올방개 묵은 여름철에 거의 안 끓이는 관계로 가을과 겨울철에 많이 판매됩니다. 깨묵은 올방개 90%와 흑임자 10%가 사용됩니다"

이처럼 도토리묵을 비롯 울방개묵, 건조묵, 깨묵 만들기에 정성을 쏟아온 그는 최인호 작가의 소설인 〈상도〉를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거상 임상옥이 "진짜 상인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란 말에 깊이 매료되기도 했다.

"아내는 토,일요일이 없이 일을 한다고 불평은 하지만 고객들과 약속을 잘 지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 사실 제가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수익은 변변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사람을 얻는 것이 즐겁습니다. 저희 제품을 찾는 고객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의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좋은 제품을 계속 공급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라보이는 하늘은 청량했다.

"가업 이은 풍부한 경험 고객들 배려 도토리묵, 올방개묵 깨묵 등 판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