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단 선의 현장, 젖어드는 훈련의 추억

▲ 세탁부의 옛 모습.
▲ 도치원.
학교는 방학을 하고 직장은 휴가를 떠나는 계절이 왔다. 필자가 중·고등학생 때는 언제나 설레고 기다려졌던 것이 방학이다. 그 이유는 교당에서 훈련을 가기 때문이다.

중 3학년 때 교당에서 실시하는 훈련을 처음 받아보고 그 뒤로 일 년에 두 번 훈련을 가기 위해서 교당을 다니는 것처럼 훈련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 신성회 훈련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당시 원불교대학원대학교에서 진행되던 신성회 훈련에 참석하면 총부에서 훈련을 받을 수도 있고 총부의 구석구석을 다녀볼 수 있었기에 더욱 특별했다. 신성회 훈련을 가는 것이 무한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또한 학교에서 방학 기간에 보충수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담임선생님과 면담하며 "제가 진학하고자 하는 학교는 원광대 원불교학과인데 그곳을 가려면 신성회 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게 해서 보충수업을 받지 않고 신성회 훈련에 참가했다. 어린 마음에 가고 싶었기에 이야기를 꾸며서 한 것이다.

교단 초기의 선 훈련

교단 초기 훈련에 입선하려면 엄격한 과정들을 지켜야 했다. 먼저 입선인 가족의 허가가 있어야 하며, 훈련 기간 중에 의식비용의 준비가 돼야 한다. 또한 입선 중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서신왕래 및 외출 외박을 금했다. 훈련 일과는 8시간 공부, 8시간 운동, 8시간 취침이다. 공부는 2시간 좌선, 2시간 경전연습, 3시간 일기, 2시간 강연으로 짜여졌다.

이렇듯 체계적인 훈련을 진행하기에는 여러 방면으로 부족했다. 이제 막 총부가 자리 잡은 터라 상주하는 인원의 숙소마저 비좁은 상황이었다. 또 농번기에 선을 나게 됐으니 훈련에 입선하게 되면 농사지을 인력 또한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다.

결국 선을 날만한 시설의 확보는 전음광 선진의 사가를 빌려서 선을 나도록 했다. 또 농번기 노동력 문제로 인한 입선인 문제는 결국 제1회 을축하선은 여자선진들만으로 구성되어 선을 났다.

제2회 을축동선부터 남자선진들도 참여했다. 선을 나는 공부장소는 전음광 선진의 사가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숙소에 있어서는 '꼭두마리 집'을 사용했다. 꼭두마리 집은 요즘 총부에서 세탁부로 불리던 건물이다.

총부 건립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열악하여 송적벽 선진의 발의로 엿장사를 했다. 이 집에서 엿 곱는 일을 하여 '엿집'이라 했다. 곡주형 집이라 '꼭두마리집'이라고도 했다. 엿장사 하는 일이 이익은 많지 않고 공부에 지장이 되어 그만두게 되면서 원기10년(1925년) 6월 엿방을 폐지했다.

그 후 식당과 사무실 그리고 여자 숙소를 겸하여 사용했다. 원기14년 본원실의 조실(서아실)이 금강원으로 옮겨졌으므로 사무실이 본원실로 옮겨졌다.

다시 원기16년경 신영기 씨의 희사로 사무실을 구정원으로 옮김에 따라 '부인선원'(여자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담장을 신설 개수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시행되었던 교단의 훈련은 배움의 깊이가 일정치 않은 가운데 못 배운 이들이 많아서 아주 기초적인 단어의 해석에서부터 시작했다. 경전법규 연습, 염불을 할 때는 서로 운곡이 맞지 않았다.

결국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할 때 마지막 타불의 음절에 죽비로 신호를 해 함께 맞춰갔다. 특히 강연을 할 때면 누구도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때로는 옷고름만 잡고 있다 내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미닫이 칸을 닫고 입만 내보이며 말을 하기도 했다. 또 탁자 위로 얼굴만 내밀고 숨어서 몇 마디 하다 내려오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훈련이 되면서 학문의 문리가 열리고, 자신의 성품을 보면서 진리의 눈을 떠갔다. 그 결과 제자들은 대종사의 분화신으로 지방 교무로 발령을 받아 혈심혈성을 다했다.

당시 제자들은 교법을 실천하는 산불법인으로 성장해 오늘날의 교단을 이끌어갈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

또한 선을 통한 의두의 깊은 단련은 정기 훈련뿐 아니라 상시 훈련에서도 지속적인 공부심을 불태우게 했다. 깔깔대소회와 틈틈이 진행한 소창에서는 서로간의 동지애를 깊게 했다.

그리고 경진동선 당시에는 소태산대종사가 게송을 발표했다. 이렇듯 동선과 하선을 통해 교단의 역사적인 일들과 사료가 남겨지고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교무 강습회, 교육과 훈련 형태로 변화

선을 나는 횟수가 많아질 수록 선객의 수는 불어가고 진리는 깊어져 갔다. 그리고 삼산 김기천 종사는 대종사로부터 견성인가까지 받게 됐다.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법열 속에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일제의 정책이 바뀌면서 민족에 대한 억압, 수탈이 가중되면서 나타났다.

모든 모임에는 집회원을 제출하고, 모임의 횟수와 기간을 통제하면서 동하 3개월씩 진행하던 하선과 동선은 때로는 교리강습형태의 명맥만 유지했다. 또 단기선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초기 교단에서 선이 갖는 의미는 교역자의 양성, 교역자 및 선원의 훈련 역할이었다. 교역자 인재양성은 해방 이후 유일학림으로 시작되는 교단의 인재양성기관으로 발전했다. 영산선학대학교와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교역자 및 선원의 훈련역할의 기능은 교무훈련의 맥락으로 교무강습회가 있었으며 재가 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리강습이 진행됐다.

교무강습회는 원기23년 대종사의 설법과 지도아래 교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효시가 됐다. 교무강습회를 통해 교리의 새로운 이해와 함께 대중교화의 새로운 틀을 잡게 됐다.

그리고 교리강습은 대종사의 지방 순회 시 처음 시작이 되었던 것으로 아침의 좌선, 오전의 법설, 오후의 의두 연마, 저녁의 질의시간으로 약 10일간 진행됐다.

후일 교무강습회는 해방 이후 각 지방에서 전담하여 교무선으로 진행이 됐다. 한국전쟁이후 시국이 안정되면서 교무강습, 교무훈련의 형태로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 중앙중도훈련원에서 전담하는 전무출신훈련으로 정착이 됐다.

대종사 재세 시 선방과 부인선원으로 사용이 됐던 건물은 오늘날 구조실, 본원실, 세탁부 등으로 보존이 돼 있다.

특히 본원실은 원기12년 경 금강원을 지어 그곳으로 조실을 옮겼으며 원기17(1932)년 8월에 앞 벽을 트고 유리 창문을 달고 함석지붕을 올렸다. 엿방으로 사용이 돼던 꼭두마리집은 원기58년 중앙선원이 발족됨에 따라 총부 내 세탁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통칭 '세탁부'라고 불렸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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